FAO(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 동아프리카 에서의 농업에 생물다양성을 고려한 기술 보급 가이드라인

동아프리카에서의 농업 생산과 관리에 생태계 서비스와 생물다양성의 주류화

(Mainstreaming ecosystem services and biodiversity into agricultural production and management in East Africa)



2016 FAO 출간



부제: 국가 단위의 생물다양성 전략과 수행 계획이 농화학 제품 사용을 최소화 하는 것의 실용성 고려


초록: 이 가이드라인은 기술적 측면에서 국가가 농업에 있어 생태계 서비스와 생물다양성을 주류화 시켜야 하는 필요성을 보여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생물다양성 전략과 수행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려는 국가들이 생태계 서비스를 - 그것들을 관리할 수 있는 기회도 - 농업생산체계에 고려하는 것을 돕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EU의 지원금을 받아 시행된 "AC P 국가들의 다자간의 협약에 관련한 역량개발(MEAs)" 프로젝트를 통해, 동아프리카 지역에 초점을 맞춰 주로 케냐에서의 실제 사례들을 우선적으로 담고 있다. 실용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국가로 하여금 MEAs와 시너지 효과를 내는 역량을 갖출 수 있고, 생물다양성과 생태계 서비스 관리 기회를 확인하여 농화학 제품 투입을 줄이는 것을 돕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기술적, 기관 단위적, 정책적 수준을 모두 다루었다. 이 문서는 생물다양성과 생태계서비스에 연관된 세부 주제의 전문가들이 준비한 기술적 문서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한 사회적이고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지식과 같은 다각적인 면을 담기도 한다. 




원문 다운:  http://www.fao.org/documents/card/en/c/f60bee66-969d-49c4-8f3f-833eeaa3a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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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 연습과제

3D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인 MAYA 수업 과제물들




* SBS아카데미컴퓨터아트학원 *




01. 모나미 


polygon 이용해서 볼펜 심까지 만들기





02. 아이폰 se 


Nurbs 이용해 형태 만들고 렌더링








03. 레고 스파이더맨


polygon으로 모델링, UV 씌워서 스파이더맨으로 만든 후 배경 넣고 조명, 카메라 설치 후 렌더링


+
모델링 선 보이는 이미지 






04. 컨버스


Nurbs로 형태 만든 후 polygon으로 변형

UV 씌운 후 bump로 질감 표현, 배경 넣고 조명, 카메라 설치 후 렌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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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르 UNDP 개발협력 사례

http://www.undp.org/content/undp/en/home/ourwork/ourstories/reduire-les-risques-climatiques--le-niger-sadapete--.html






단상

: 결국 선진국의 발전으로 악화된 기후변화의 대가를 후진국이 떠맡으면서도 거기서 GMO 실험을 하는게 과연 옳은 것인가, 그들은 이미 선택권이 제거된 상태인 듯.



캐나다는 왜 펀딩을 했을까? 캐나다와 아프리카의 관계는?



토종씨앗보다 GMO가 우월하다면, 정말로, 토종씨앗을 보존할 필요는 없는걸까? 왜 보존하자고 하는 걸까?




[the Nature Conservancy] 탄자니아에서 본 기후 변화, 보건, 인구 역학

원문 link : 

http://blog.nature.org/science/2016/01/07/climate-change-health-population-dynamics-tanzania-women-contraception-environment-family-planning/



[번역문]


Swema Kabliya walks to get water in the  village of Nkonkwa, on Lake Tanganyika in Tanzania. Photo © Ami Vitale


전 세계의 사람들이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축하하고 있는 사이에, 전세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각 나라들이 재정지원 서약을 수행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들이 있습니다 - 특히 개발도상국의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위한 기회들입니다.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기후변화에 적응하도록 돕는 진보적인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의 보건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가족 계획은 여성의 건강 수준을 대단히 좋아지게 하여 적응 수준과 여성보건을 동시에 증진시키는 인권 기반 전략으로 취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과학자들과 정부들은 인구 증가와 세계 탄소 배출량 간의 관계가 있으며 가족계획으로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 증가를 늦추는 것은 장기적으로 탄소 배출을 낮춰 상당한 기후관련 이득을 끌어낸다는 연관점을 연구자들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인권 측면에서 본다면, 지구 상의 대략 2억 2500만 명의 여성들이 가족 계획에 대한 필요를 느끼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자녀의 수와 연차를 계획하고 싶어하지만 현재로서는 현대적인 피임법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발적이고 인권에 기초한 가족계획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여성과 그들의 자녀, 그리고 기후를 위한 글로벌 해트트릭이 될 수 있을 것 입니다.




가족계획과 기후변화: 탄자니아의 가장 낮은 곳에서


파리에서 열린 협상에는 오지 못했지만, 탄자니아 서쪽 Tanganyika 호수 해안가에서 자원에 의존하는 주민들을 포함한, 전세계에 9억 명의 지역 취약계층민들은 기후 변화의 현실에 적응토록 돕기 위한 정책의 길을 닦는 협상 테이블에서 나올 결정들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탄자니아는 매우 기후변화에 취약한 곳입니다: 1960년부터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평균 연중 강수량이 심각하게 감소하고 있으며, 계절적인 강우 패턴도 이미 변했습니다. 전 인구의 80%가 농사와 유목에 의해 소득, 생계, 고용을 의존하는 가운데, 이 나라와 국민들이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보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족 계획은 탄력성을 갖추기 위한 핵심 요소입니다.


2011년 8월, 나는 탄자니아 서부 Buhingu 지역의 의료센터 책임 의사를 만나고 그 지역 시설을 보기 위해 의료센터를 방문했습니다. Tanganyika 호수의 아름다운 만을 바라다보는 멋진 위치에도 불구하고, 의료센터는 전문적인 기관이라기보다는 낮은 수준의 병동 같아 보였습니다. 빈 수술실에는 멋진 조명이 있었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벽들은 바스러졌고 선반들은 의약용품이 없었으며 병실은 텅 비었습니다. 단 하나 비어있지 않은 방에는 두 명의 여성이 낡은 발포 고무 매트리스가 깔린 철제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중 한명은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바로 전날 밤 그 두 여성에게 제왕절개 수술을 했었다고 말했습니다. 한 아기는 살았지만 다른 아기는 죽었다고 합니다. 아기를 잃은 여인은 진통 중에 병원에 오기 위해 이틀 동안 걸어왔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아기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습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고, 방을 가로 질러 슬픔에 잠긴 여인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단 하나의 스와힐리어를 말해주었습니다. "pole sana" 정말 유감입니다.


이는 왜 외진 지역에서 보건, 자발적 가족계획이 천연자원 관리와 자연보호 만큼이나 프로젝트에서 고려되는 것이 영 말이 되지 않는 게 아니란 것을 요약해주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24개의 마을이 Tuungane (스와힐리어로 "뭉치자"라는 뜻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TNC와 Pathfinder International 간의 파트너십으로 이 지역의 주민들의 전체적인 생식보건, 환경, 생계 어려움을 고려하는 프로젝트 입니다. 



탄자니아 서부: 생물다양성, 낮은 보건수준, 빠른 인구증가율에서 모두 1위


Tanganyika 호수는 세계에서 2번째로 부피가 큰 호수로 이 호수와 호수 주변을 둘러싼 숲은 고유종인 시클리드(어류)와 침팬지를 자랑하는 민물 생태계 부터 육상 생태계까지, 세계적으로 생물다양성이 매우 밀집된 지역입니다. 이는 모두 여전히 상당하게 온전함을 유지하고 있는 환경 속에 존재합니다 - 자연보전의 축복과 그곳이 단 하나의 공공도로이기 때문에 폐를 끼칠 수 밖에 없는 약간의 지역 주민들의 영향 안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여성들의 건강이 난산과 같은 비상사태에 직면하게 될 때, 배를 타고 Kigoma로부터 여러 시간이 걸리는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향하는 것은 실제적인 난관입니다. 더욱이 접근하기 어려운 탄자니아 서부 지역은 대부분의 정부측 의료계 종사자나 농업연구원, 교사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아닙니다. 지역 주민들은 충분치 않은 스텝들과 시설 제공이 없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탄자니아는 큰 나라입니다. 그 크기는 텍사스와 콜로라도 주를 합친 것과 같습니다. 탄자니아의 인구는 꽤 어린 편입니다: 2014년에 15세 미만의 인구가 전체의 45%로 추정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 내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며, 총 5200-5300만 명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15년 후인 2030년이 되면 인구는 7940만으로 늘어날 것이며 2050년에는 출산율이 상당히 낮아지지 않는 한 인구가 현재보다 2.5배 더 많은 1억 2940만명이 되어 세계에서 15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가 될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빠른 인구 증가율을 야기했을까요? 결혼한 여성 중 현대적인 피임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바로 옆 케냐에서는 53%인데 비해 탄자니아에서는 26%뿐이 되지 않습니다. 탄자니아 서부 Kigoma 지역에서 이 비율은 14%까지 떨어집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Kigoma에 사는 여성 중 41%은 피임을 원하지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탄자니아 서부 총 출산율은 7.1 이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편입니다. 빠르게 연속으로 임신을 하는 것은 종종 높은 산모 사망률로 이어집니다. 탄자니아 서부 교외 지역과 같은 곳에는 자발적인 피임이 더 많아져야하는 것이 시급하며, 그래서 그 여성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가족계획을 할 수 있고, 더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과 공간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조혼도 임신 가능기간을 늘려 출생률에 큰 영향을 미치며, 사춘기 소녀들에게 큰 건강 문제를 만듭니다. 탄자니아에서 소녀들은 18살이 될 즈음 학교를 졸업하는 것보다 결혼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오직 33%의 소녀들만이 중학교에 입학하는 반면에, 대략 40%의 탄자니아 소녀들은 그들이 18살이 되기 전에 결혼합니다.


탄자니아 서부의 인구에 얽혀있는 문제들과 천연자원 관리, 기후변화 적응 필요성은 통합적인 방법으로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나는 파리기후변화협정의 목표가 취약한 계층의 사람들이 기후변화에 적응하도록 직접적으로 돕는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추가적인 전진이 나타날 수 있길 바란다. 기후 적응, 출산 보건, 자연보전을 공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통합적인 길 안에서 국가들이 회복력을 갖추고 새로운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인권을 고려하고 전 세계와 개인적인 단위에서 여성과 아이들을 위하는 자발적인 가족 계획의 좋은 면을 인정하는 것은 수백만명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 탄자니아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원문 저자 소개: 

Kristen P. Patterson은 워싱턴 DC, 인구조회국에서 수석 정책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인구조회국에서 일하기 전 Kristen은 Nature Conservancy의 아프리카 프로그램에서 6년 가량 일했습니다. Kristen은 또한 마다가스카르에서 USAID 인구-환경 펠로우쉽으로 있으며 보호구역에 인접한 주민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Kristen은 Niger에서 Peace Corps 봉사단원으로 그녀의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공공보건과 보전생물학/지속가능한 개발로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Kristen은 정원 일을 좋아하며 가능한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요약문]


탄자니아는 인구 증가율이 대단히 높고, 세계적으로 생물다양성이 높은 생태계를 가진 아프리카 국가다.

탄자니아의 생태계는 기후변화에 취약하여 이미 기후변화에 의한 강수량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인구 소득의 80%가 농업에 의존하여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이 시급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꼽히는 탄소배출은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구 증가에 비례한다고 알려져있다.

탄자니아의 빠른 인구증가율은 기후변화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 인권 측면에서도 제재될 필요가 있다.

현대적 피임법 부재와 조혼이 탄자니아의 출산율을 높였으며 또한 산모 사망률도 높이는 원인이 된다.

피임법 보급과 가족계획을 장려하는 것은 탄자니아를 포함한 개발도상국에서 환경문제와 인권문제를 함께 해결하는데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 및 질문]


- 같은 아프리카 국가인 케냐에서는 피임법 보급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

- 공공보건적 측면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책까지 고려한 점은 좋았지만 기사 글 안에서 인구변화와 탄소배출량의 상관관계에 대한 그래프나 근거 자료가 함께 제공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됨

- 또한 현재 세계적으로 인구 증가율과 인구수가 동시에 높거나 전체 인구 증가율에 기여도가 높은 국가들을 수치적으로 보여주면 좋았을 듯 싶다. 특히 그런 국가들 중 피임법이 도입되었음에도 출산률이 높은 곳은 왜 그런지 생각해보고 싶다

- 탄자니아 서부의 시설 및 지원이 증대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 조혼을 장려하게 된 탄자니아의 문화는 무엇이 있을까?

- 본문 내에서 천연자원 관리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실제적인 사례와 문제점은 빠져있다. 탄자니아의 천연자원은 어떤 것이 있으며 인구 증가율을 낮추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 탄자니아의 인구구성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다면 본문을 더 읽기 수월할 것 같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진작 읽었는데 후기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오랫만에 만난, 읽다가 영혼이 떨려 눈물이 난 책이다.



그냥 내가 처한 모든 상황과 내가 겪은 모든 시간들에 대한 답을 주었다.


아주 아름답고 힘이 솟는 답. 그리고 닫혀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답.

기존의 내 생각들과 상반되지 않는 공존하는 답.




삶의 의미는 어떤 상황이더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데서 나온다는 것.

내가 누구에게 유용하거나, 남을 돕거나, 유명해지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끔찍하고 비통하고 처량한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내 태도를 유지하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여전히 내 몫이며

그 상황 속에서 이뤄지는 '현재'로부터 '미래'에 이어지는 내 선택들이 나의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과거들은 내가 가치롭게 생각하는 선택들로 말미암아 빛이나게 되고

나는 내 의지의 구현을 보며 삶의 맨 끝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황한 듯 보이지만 한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 자유의지가 나의 의미를 만들어준다는 것.




때로 혼자먹는 저녁이 잦아지고 아무도 부를이 없고, 나를 써먹어주는 사람도 없는 기간이 길어질 때면

나는 무척이나 무기력해지고. 스스로가 쓸모없는, 무의미한 인간같이 여겨진다.


그럴 때에도 프랭클 박사의 말에 따르면

그런 나로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아무렇게나 시간을 내팽겨둔채로 좌절하며 보낼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기회를 위해 용맹하게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설지

최소한 옆의 힘든 이웃을 돌볼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는지 

긍정적으로 대처하려고 유머를 구상한다든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또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은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잘나야지만 의미있고

그렇지 못하면 의미 없다고 여겼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성공하지 못한 나와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 임시의 시간 속의 나는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고선 이런 시간 속에서 나의 선택이 결국 나를 의미있게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다.


너무 당연한 말인가?


진짜 무기력하고 우울한 사람에게는 마치 빛과 같은 말들이었다.


그 부분을 읽은 날을 잊을 수 없다.


함박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책을 읽다 여러번 울었다.


이해가 된 다음에 잠시 책을 덮고 한 정거장을 눈을 맞으며 걸었다.


세상이 참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는데

이제 삶이 의미있게 느껴졌다.



나는 가장 최하층의 사람이 되더라도

그 상태에서 내가 만들 선택들로 인해 내가 '의미'있어질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 잘나지 않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충분히 모든 순간에 가치있음을 느꼈다.



얼마나 쓸모있고 인정받느냐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어떤 사람으로 남으려 애썼는가' 에 내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뜻인즉, 앞으로 엄청난 고난과 시련과 좌절이 닥쳐도,

내가 넝마같이 찢어지고 쓸모없는 존재가 된 듯 하여도

내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한, 나는 내 뜻을 세상에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선택들로 하여금.



아주 작은 선택들로 하여금 말이다.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을지.

제때에 식사를 할 지.

옷을 깔끔하게 다려 입을 지.

상냥한 미소를 지을 것인지.

험한 말을 꾹 눌러 참을지.



그런 작은 것들로도 말이다.

그런 것들로도 나는 '따뜻한 사람으로 남겠다'는 의미를 남길 수도 있고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이라는 의미를 남길 수도 있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선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남길 수도 있겠다.




사실, 엄청 유명한 '위인'이 되고 싶어했다. 

돈을 천문학적으로 벌거나, 뛰어난 발견을 하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 말이다.


철이 들 무렵엔 그런 성공들은 물론 존경스럽지만

수백년만 지난다면 아마, 교과서에 남기조차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것이 무가치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족부양에 대한 책임도 기꺼이 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번 뿐인 인생, 뭔가 크게 하나 남겨서 발자욱을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는데,

그게 정말 그냥 되는 것도 아니오, 지금 세대에서 세계 1위를 해도 수백년뒤에 없어질 거라니 정말 힘이 쭉 풀렸다.

게다가 어차피 아무것도 흔적없이 사라질 것들인데 하루하루 해내야 하는 일들은 너무도 힘들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살지는 않을 테다.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중요했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스스로를 무의미하게 여겼다.

무언가 눈에보이는 것을 남겨야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책은 내게 내 가치관을 남기는 것이 

진짜 내 의미를 세계에 남기는 것이라고 가르쳐줬다.



돈을 벌어서, 성공해서, 유명해져서 삶의 의미가 남는 것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선택들을 끝없이 지속해서

결국은 죽을 즈음에 '아, 김 아무개는 참 이런이런 사람이었다'

하는 것이 나라는 한 개인의 삶의 의미인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위인들도 '내가 위대한 일을 해야겠다'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힘든 가운데에서도 관철해낸 결과로 유명해진 분들임을 깨달았다.




특히 무슨 조직에 들어가서, 시험에 붙어서, 그 뒤에 내 의미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무직상태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혼란 속에서도 내 의미는 발현되는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

내 일을 사랑하는 것


그 어느 것이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 가치를 위해서 

하루하루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내 삶의 의미를 구현하는 길이다.



지금 하루하루의 내 선택들이 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형성한다는 것에 소름끼치게 동의하면서

내 삶을 내가 참 무책임하게 내버려뒀구나 싶었다.

될대로 되라 하는 마인드가 없잖아 있었는데

많이 반성했다. 나는 내가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아가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할 책임이 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땐, 밤에 잠들기 전에 30분씩 읽곤 했는데, 그 전 책은 말랑말랑해서 잠들기에 도움이 되었으나 이번 책은 수용소의 끔찍한 생활이 나와서 읽기 꺼려지곤 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이 책은 나치의 억압에 대한 책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존재하는 사람의 마음, 그 자체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신이 계셔서 이렇게 뛰어난 정신의학자를 이렇게 끔찍한 지옥 속에 넣으신 것일까. 

역사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이 우리에게 큰 지혜를 주었다.






이 후로는 나에게 와닿은 책의 문구를 적어두겠다.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내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 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계산이지 희생이 아니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도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그리고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나게 된다."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의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 예를 들자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도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 감각 - 내면의 시간 -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감자들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여기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언급되어 이 책을 다 읽은 뒤에 빌렸으나 작중 초반 분위기가 너무 암울한 듯 하여 손이 안가는 중.....



"당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 한 저명한 연구전문 심리학자는 강제수용소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 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마디 더 붙이자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나라 취준생, 고시생, 온갖 미생들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이 끊임없이 고통받는 것이다. 학생때와 달리 이것은 아무도 그 기간의 '끝'이 언제인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 이 뒤에 묘사되는 수감자들이 느끼는 '일시적인 삶'은 정말 모든 페이지가 가슴을 울린다. 저작권 생각때문에 다 못 적는게 아쉽다. 정말 다 좋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삶은 전혀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 나도 정말 그랬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시대에 복고 열풍이 부는 것도 이 때문은 아닐까?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 이는 사실 무척이나 과한 요구이다. 동물인 인간은 외부에서 이토록 가혹한 환경이 둘러싸게 되면 그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만 해도 정신의 모든 면을 다 써버릴 수밖에 없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제 3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여기서 행동해 나아갈 것인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는데, 이는 배고픔, 무뎌진 감각, 희미한 이성, 고통, 모욕, 기타 생각하기도 어려운 감정적 좌절과 괴로움을 느끼는 상황에서 이성을 차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DNA에 프로그래밍 된 데로 고통이 닥치면 고통을 가장 완화하는 방면으로 기를 쓰기 마련이다. 그게 어찌보면 생존욕구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저자는 그 본능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 길을 제시한다. 나는 때론 왜 그렇게 까지 의미있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사실 지금 느끼는 고통, 즐거움, 괴로움과 같은 감정이 '나 자신'한테는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동시에 위대한 인물들은 정말 일반적인 반응을 다 뛰어넘어야 나타나는 것임에 대해 경외감이 든다. 저자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와 같이 말한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이런 끔찍하게 어려운 일을 우리가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테다. 삶의 의미가 없다면, 그냥 고통을 완화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사실 자살이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삶을 마감하는 것이 내 존재 이유인가? 그러면 너무 슬프고 좌절 밑의 좌절이 다가오지 않는가.... 플랭클 박사는 삶의 희망을 주기위해서 어려운 길을 가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괴로움에도 이것은 희망의 길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살아가기 위한 의지를 자아내기 위해선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 그 의미라는 것은 자신을 가치 있도록 만드려는 의지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고통에 함몰되지 말고 스스로를 초월하는 기회라고 여기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 의지가 내가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즐겁지만은 않은 인생관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고 자란 이 세계는 사실 그다지 항상 즐겁지만은 않은 곳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마다 이것이 결여되있었다. 남들은 10년뒤 자신을 그리면서 있는데, 나는 그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내년의 나 자신이 그 안에서 갖고 싶은 미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반대로 나는 그만두는 것에 대해 나의 미래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쉽게, 더 즐겁게 사직서를 쓸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 p.133


: 그렇다, 미래에 대한 믿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말 중요하다. 삶을 구렁텅이 속에서 일으키는 존재이고, 삶을 일순간 무가치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정말 중요하다. 이것이 없는 삶은 마치 영혼에 구멍이 뚫린 것만큼이나 허무하고 괴롭다.



이것이 없어져버린 수감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뒤에 설명이 나온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떠한 반응에도 무감각해지며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적이 있지 않은가?

살아갈 의지와 힘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은 무서울만큼 급속도로 삶에서 멀어진다. 심지어 체력과 면역력조차 약해진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 삶에 대한 의지...........


정말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다. 내 위치와 상태를 객관화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침대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기만 하는 존재. 나는 죽을 상황이었다. 지금도 사실 의지가 없다. 어떻게 미래에 대한 믿음을 찾아야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그것도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리 읽어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아직 내공이 부족한가..


그래도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목표라는 건 내가 만들어가야하는 것임도 깨달았다. 남이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지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했다."




: 이 부분의 소제목은 [살아야 할 이유]이다. 나는 이 제목을 발견하고 드디어 해답이 내려지는 구나! 옳다거니! 하고 읽기 시작했더랬다. 


그리고 답을 얻었냐고? 아니다. 나는 그 해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이 해답은 지금의 나로서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너무 모호하게만 들린다. 한가지, 내 행동과 태도로 인해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만 지금은 이해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책임감을 가질 것과 그 과정 자체에서 삶의 의미가 생겨난다는 것.


그러므로 지금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과제를 찾고 내 방식대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 

허구한 날 명상하고 나 자신이 인생에서 완수해야할 비젼을 구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


언젠가 더 시간이 지나고 더 경험을 쌓고 내가 더 현명해 질 때 또 다시 이 부분을 읽었으면 한다. 그 마음에서 이 부분을 다 적어두었다. 그 때의 나는 이 글을 더 잘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그 어떤 책이나 기사나 인터넷 자료들보다도 바로 이 책에서 삶의 진짜 의미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방금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세 첫 완패를 기록했다. 인간은 앞으로도 인공지능에게 끊임없이 패배할 것이다. 이것은 그 시작인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인공지능에게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패배당하는 인간의 삶과 개인적인 미래, 삶의 희망에 대해 누가 신경쓰고 있는가? 아무도 없다. 이세돌은 만약에 5판 완패를 당한다면 바둑기사로서의 삶 자체에 돌을 던져버릴까? 그 이후로 그에게 바둑은 전과 같은 의미일 수 있을까.


사람은 감정이 있는 동물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렇게나 대하면 개개인에게는 끔찍한 일이 닥칠 수도 있다. 감정적인 고통은 계산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해득실관계에서는 무의미해보이는 상태에서도 인간은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알파고가 아무리 이긴다 해도 실질적으로 이세돌을 죽이지는 못한다. 정신을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건 이세돌 본인이 얼마나 강하게 이겨내느냐에 달린 것일 테다. 죽지 않으면 인간은 일어날 수 있다. 기계는 애초에 실패와 성공 속에서 좌절과 환희를 느끼지 못한다. 실패하면 새로 계산하고 해법을 찾으면 되고 성공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사람은 좌절과 나락 속에서 이겨내는 인간 자체에 갈채와 존경을 보낸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더 발달할 수록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 유능하고, 똑똑한 인간이 존경받는 시대가 저물어간다. 그들도 물론 뛰어나고 대단하지만 그들이 기계 앞에서 패배할 때 보이는 태도, 그것이 존경받는 시대가 떠오를 것이다. 패배한 뒤에도 스스로를 잘 추스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자세를 갖추는 것, 무너지지 않는 것! 그리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


이세돌도 이번 패배 이후 승리할 지 모르겠으나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알파고 또는 다른 인공지능에게 질 수 있다. 그 패배 이후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것이 '이세돌'이라는 사람에 대한 진짜 역사로 남을 것이다. 사람의 삶의 의미는 그 패배 이후의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패배와 좌절, 시련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을 놓아버리는 태도가 우리를 무너뜨린다. 이 책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공정하게 얘기해서 미래가 가망 없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도 모두 생각을 같이 했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 드리워져 있는 장막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또한 나는 과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즐거운 일들과, 그 빛이 현재의 어둠 속에서도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를. 이때 나는 또 시를 인용했다. ...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 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환멸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토록 잔인해 보이는 운명 그 자체이다.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까지 가보아싿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이후에는 개인으로서의 저자라기 보다는 정신과의사로서의 저자의 목소리가 더 드러난다. 그러면서 더 전문용어가 많이 나오고 더 객관화시켜 말하게 되면서 나의 공감도 떨어졌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내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 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 많지 않은가? 특히 학교에 보면 말이다. 많은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지 못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성적 탐닉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잇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저자는 피할 수 없는 시련을 겪는 사람은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품위있는 것으로 여길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태도의 전환이 시련을 의미로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라고.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덯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은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 또한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장도 명확히 이해하진 못했다.

다만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두면 오히려 갖지 못한다는 것.



"... 여론조사를 보면 조사에 응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유명한 예술가도 아니고 유명한 과학자도 아니었다. 유명한 정치가도 아니고, 유명한 운동선수도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당당하게 곤경을 이겨낸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가장 눈물이 나는 이야기'는 곤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인간적이다.




지금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이겨내는 인간이 되기를. 나 스스로에게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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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코 로카] 주름  (0) 2015.11.07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오랜만에 '맘에 드는 작가'를 만나 더할나위 없이 기쁜 맘으로 그의 책을 또 찾아 읽었다.


웬걸, 이번 책은 전 처럼 쉽게 읽히지가 않았다. 번역문이 좀 긴 문장을 있는 그대로 번역해서 인거 같기도 하고 또 사람의 마음이 아닌 사회의 단어들이 많이 들어가서 인것 같기도 했다.


책 서문에 작가의 말에 정말 공감한다. 사실 사람의 인생을 시간적으로 본다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일'이다. 그런데 온갖 예술은 그 일에 대한 것들을 그다지 조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람에 대해 알아갈 때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나 자신 조차 투자회사에서 다양한 산업군이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게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는가. 이 책에서 보통은 내가 들여다 봤던 것보다 더 가까이에서 우리 사회를 감싸는 산업들과 그 안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책은 각 파트 별로 주제가 다른 듯 하다. 고로 파트별로 느낀 점과 와닿았던 문구들을 적어본다.



1. 화물선 관찰하기


"예를 들어 치약에 첨가하는 폴리올은 치약의 습기를 유지해준다. 구연산은 세제를 안정시키는 데 이용된다.."

: 우리 문명은 갈수록 정교해져서 사람들이 자신이 쓰고 있는 물건 단 한개도 혼자서는 만들수도 없고 그 성분이 무엇인지 원료는 어디서 구해오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게 되가는 것 같다.... 소외.


"이런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타고난 게으름을 억누르고 화학과 물리학의 괴로운 딜레마들을 정복하기 위해 노려가는 엔지니어들이다. 이들은 가연성 용매의 저장이나 펄프의 수증기에 대한 반응을 전공으로 삼고 20년을 보냈을 것이며, 여가 시간에는 원유와 화학물질의 안전한 처리와 운송을 다루는 세계유일의 월간지 <위험한 화물속보>를 넘길 것이다."

: 이게 내가 바로 대학원에서 느낀 점이었다. 그 학계 내에서는 무척이나 핫하고 최근 이슈일지라도 한발짝만 떨어져 나와 본다면 참... 이걸로 20년 바칠만한 의미가 삶에 존재할까 싶은 그런 주제들이다. 하지만 또 세계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저 쓸데없어보이는 연구를 지속함으로서 예상할 수 없는 전 사회적인 기술발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맞다. 결국 과학자들도 이제는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다.



"산업의 이런 지류를 만들어나가는 데 투자한 사람들의 인내심과 배짱에는 감탄할 수 밖에 없다...투자자라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집배원이나 간호사들이 평생 저축한 돈을 가져다 파나마의 창고나 함부르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무실에 집어넣는 일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아니고, 오만한 것도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금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10년 이상 박아두기도 한다. ...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투자가 결국에는 인내와 활용에 대한 보상으로 부풀어올라 다시 자신들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이런 식의 지출이 알고보면 신중한 태도로서, 침대 밑에 도을 두는 것 - 결국에는 궁핍과 파산에 이르기 십상이다 - 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투자자들과 일하며 느낀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떻게 보통은 이렇게 세밀히 파악했나 놀라울 정ㄷ다. 그들은 인내에 대한 보상을 받는 사람들이고 또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돈의 가치 변화에 대해 민감하여 돈을 더 안전하고 유익한 방향으로 - 본인 스스로에게 - 굴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간호사들과 집배원들과의 대비되는 이 무시무시함. 이렇듯 세상은 다 비슷하게 살아가는 듯 하지만 실상 전혀 그렇지 않을 대도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삶'이라는 측면에서는 비슷한걸지도 모르겠다.



"조류학자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파란색과 잿빛이 섞인 보통 새라고 여기고 곧 고개를 돌려버릴 새를 쌍안경으로 관찰하고, 상아 해안의 늪지대 서식지에서 ... 를 올해 처음 만났다며 기뻐하지 않는가."

: 내가 생태학자가 주는 이점을 보고 생태학을 깊이 파려고 할 때 느꼈던 이질감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기쁘고 즐겁게 생물체를 바라보지 못했다. 못하겠다. 펭귄은 귀엽고 팬더도 귀엽다. 거기까지다. 일반인인 상태로 그들과 함께하다보면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내 자리는 이곳이 아닌 것 같다- 하고.




정작 우리 사회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우리 사람들의 삶에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 없는 현대 산업은 일상 생활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저자는 화물선을 오로지 관찰만을 위해 관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지만 이 산업체들을 구성하는 것들을 바라볼 때 우리가 관광명소나 자연물을 관찰할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아름다움, 배울 점이 있다고 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투자회사에서 정말 이토록 많은 산업군들이 존재하는 지에 놀랐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을, 우리가 쓰는 전기부터 시작해서 내가 타이핑하고 있는 이 키보드, 그걸 입력 가능하게 해주는 소프트웨어, 오늘 먹은 아침 재료, 식기, 선반, 인쇄물인 책. 이 모든 것이 현대 산업의 결과물이다.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임을 우리는 항상 까먹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렇게 우리를 감싸고 있는 환경을 구성하는 것들이 누구로부터 어떻게 왔는지를 관심 갖는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없다.

 산업체와 일찍이 투자에 관심이 있던 대학 동기들을 제외하고는 더더욱 20대 청년들은 관심이 없다. 그들은 비로소 취업된 뒤 자신들이 그 생산자 입장이 되면서 이것들이 누군가의 노동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

 저자는 그런 노동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철저한 관찰자 입장에서 보는 우리 산업 현장을 보여준다. 그 점이 이 책의 묘미이다.



1장에서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이 얼마나 관심을 받지 못하는지 강조하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2. 물류


"2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나 소유하고 있는 한정된 수의 물건 하나하나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 나아가서 그 생산에 관여한 사람이나 연장까지 알았을 것이다. .... 그 이 후로 구매 가능한 물품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로 물품의 유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거의 깜깜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 최근에 프랑스의 한 과학자가 사표를 쓰고 난 뒤 시골에 내려가 대장장이가 된 기사를 읽었다. 우리 시대에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든 것들은 거의 보기 드물어졌다. 그래서 마치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나 회귀 운동과 같이 그런 움직임이 가끔 눈에 띄는 것이다. 

 이러한 반발적인 사례가 기사에 나올만큼 우리는 우리가 쓰는 물건의 생산과 유통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다. 이따금 우리 시대의 문명인이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정말 그저 아기와 같이 무지한 상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나만해도 그래도 시골에 가끔 가서 벼도 보고 밭고랑의 배추도 봐왔지만 갈수록 음식이 공산품화 되어 내 후손들은 치킨이나 소세지를 먹더라도 이게 원래 동물의 신체 일부였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냥 음식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이다. 벌써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소외하면 바로 떠오르는 마르크스의 '노동의 소외'는 이미 일어난 지 한참이다. 거의 모든 노동자들은 - 보통 스스로가 노동자인지 깨닫지도 못하는 경우가 한국에선 태반이지만 - 이미 자신이 하고 있는 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런데 소비자로서의 우리조차 실질적인 생산과정으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거대화, 공장화, 기계화, 자동화가 가져온 편리함의 동전 뒷면은 바로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소비자를 격리 시키는 것이다. 



저자는 소외된 우리자신을 대신하여 스스로 물류 현장으로 잠입한다. 그리고 우리가 슈퍼마켓에서 보는 물건의 원산지로부터 집까지 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류 단지에서 펼쳐지는 일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이곳의 혜택을 입고 있는 우리 대부분을 수동적인 역할로 몰아넣는다. 우리가 침대에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입을 헤 벌린 채 이따금씩 좌우로 뒤척이는 동안, 어떤 곳에서는 그날 아침의 반 탈지 우유 가운데 대부분의 물량을 실은 트럭 한 부대가 잉글랜드 북부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 만약 내가 영국 시민이었다면 더욱 재밌게 느껴졌을 것이다. 실제 영국 지명과 위치와 고속도로 명이 나와 있어 이 모든 것이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아니라 실제 내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임을 실감나게 해줬을테니!



"시간이 핵심이다. 어떤 특정한 순간, 창고 내용물의 반은 72시간이 지나면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 투자자가 되려면 먼저 그 산업의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물류업은 유통망 확보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회전이 잘 되느냐와 상품의 선적 관리도 중요하다. 시간과의 싸움이 가장 핵심인 것은 주로 농산품으로, 그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머리 위를 수많은 화물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와인이 바다처럼 넘실거리고 빵이 알프스처럼 잔뜩 쌓인 우리의 풍요로운 세계는 기근에 시달리던 중세의 조상들이 꿈꾸던 생기발랄한 곳과는 다르다.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정신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기능들을 단순화하거나 가속화하는 데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엔지니어들은 스캐닝 기계의 속도에 관한 논문을 쓰고, 컨설턴트들은 선반에 물건을 쌓는 직원이나 지게차 운전자의 동선을 약간이라도 줄이는 방법 연구에 경력을 바친다.

... 겉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법을 잘 지키고 고분고분하게 살지만, 밑에서는 소리 없이 분노가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 풍요로운 세상은 설명만 들으면 조상들이 꿈꾸는 천국이나 태평성대와 다름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도 그러한가? 빠른 수송과 뛰어난 기술을 가진 우리는 더 빠른 수송과 더 뛰어난 기술을 위해 인생을 투자한다. 

내가 GMO관련 연구를 하려다 아예 시작도 말은 것은, 식량 증대를 모토로 수행되는 연구에 회의감을 느껴서이다. 솔직히 말해서 현 시대에 식량이 부족한 것은 벼 1개당 생산량이 적어서 인가? 토지가 모잘라서 인가? 아니다. 분배와 가진 것 없는 자들을 위한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쌀 한톨에 함량된 탄수화물양이 증가한다고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인병에 시달리는 선진국 국민들에게 또다른 골칫거릴 안겨줄 뿐이다. 

 하지만 지금도 각국의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런 문제에 일평생을 투자하고 있다. 더 나은 생산량, 더 좋은 기계설비, 더 똑똑한 인공두뇌!

 이 모든 것이 삶의 질 향상에 필수불가결한 것일까? 우리는 왜 그런 것들을 만들려 평생을 바치는 것일까.

그 안에서 발생하는 것은 행복과 평화 인가?




"그러나 무엇보다 내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이런 성취에 대하여 거의 음모를 꾸민 듯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실제로 상자에 담긴 물품의 잊힌 오디세이를 관찰하고, 창고의 은밀한 삶을 목격하다 보면, 우리가 일상생활의 흐름 속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소비하는 물건들과 그 미지의 기원이나 창조자 사이가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그 독특하게 현대적인 느낌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다."

: 나도 격하게 동의한다. 그의 참치 여정을 읽으면서 내 방을 구성하는 모든 물건들의 원류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졌다.

 투자자로서 회사들을 방문하면 얻게되는 강점이 내가 하는 질문에 거의 대부분 답을 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기밀같은 것은 들을 수 없겠지만, 그 산업 경쟁구도, 생산 과정, 원재료 조달, 물품 유통 및 거래 방식. 이렇게 하나의 산업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한 산업의 흥망성쇠를 보자면 옛 시대의 왕조의 역사를 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일하면서 든 의문점은 왜 내가 이 전에는 이런 것들을 알지도 못하고 알수도 없었을까 하는 점인데, 산업체들은 생존과 수익을 위한 단체이니 만큼 정보에 매우 민감하다. 그들은 폐쇄적이고 의심이 많다. 산업스파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일반인에게 이런 정보들을 투명하게 전부 공개하는 것은 사업적으로 좋지 못한 선택이 될 것이다. 물론 공정무역을 외치는 일부 업체들에게서는 이런 것을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울 수는 있겠다.


이전에 읽은 코너 우드먼의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에서 몇 산업체들은 오히려 이런 것들이 공개되는 것을 극도로 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과 노트북 등의 IT제품들. 이들의 반도체는 주로 대만과 중국의 공장에서 나오는데, 중국의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우드먼은 그곳에서 어린 노동자들이 겪는 노예같은 삶을 보여준다. 어느 IT 회사가 그런 것들을 드러내고 보여주겠는가. 오직 하얗고 깨끗하고 뛰어난 제품 이미지만이 마케팅의 전략 아래 소비자에게 다가온다.


이에 관한 저자의 한 마디 "아마 1780년대에 노예무역에 관해 질문을 하고 다녔다면 바로 이런 의심을 받지 않았을까."



"어선은 서른세 살에 다섯 자녀의 아버지인 이브라힘 라시드 선장이 지휘했다. 그 자녀들이 생존하려면 라시드 선장은 앞으로 24시간 이내에 성숙한 참치를 적어도 열다섯 마리는 추적하여 곤봉으로 때려잡아야 했다."


"참치 떼는 시속 50km로 인도네시아 해안으로부터 소말리아로 가는 길이었다. 이 저주받은 생물은 부레가 없기 때문에 가차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그는 곤봉으로 참치를 세게 내리쳤다. 참치의 두 눈이 눈구멍에서 쑥 빠져나갔다. 꼬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입이 열렸다 닫혔다. 우리 입도 열렸다 닫혔다. ... 그가 여드레 만에 처음 잡은 참치였다. 집에서는 아이 여섯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게 바로 실제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참치 통조림의 살코기들은 결국 살아 숨쉬고 지느러미를 접었다 폈다 하던 물고기의 살덩어리다. 우리의 통조림이 있기 까지는 죽음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는 먹을 때 거의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미 그것은 생물체로부터 동떨어진 형상을 하고 있기도 하고. 

 잔인성에 대해 놀라움과 싫은 감정을 표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동시에 어부의 가족 얘길하며 이 전체적인 과정이 도덕적인 것으로 판단될 것이 아님을, 우리 삶의 - 아주 원시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오는 - 먹고 먹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화물 상자 하나는 비즈니스 클래스의 3열과 9열 밑에 고정되어 있었다. 또 한 상자는 이코노미 클래스의 43열과 48열 밑에 고정되어 있었다."

: 또 얼마나 우리가 모르는 우리 곁의 세계들이 존재 할까...?



"참치는 이 창고를 통해 슈퍼마켓으로 들어간다. 인도양의 빛 없는 소금물에서 처음 들어올려지고 나서 52시간 뒤의 일이었다."

: 지구가 하나의 마을임이 이미 현실이다. 우리가 마트에서 발견하는 것들은 대부분 세계 다른 쪽에서 어제를 보냈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2장에서 실제 우리 주변 환경을 가능케하는 사람들의 '일'을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이 누군가의 '일'의 결과임을 알려준다.



3. 비스킷 공장



2장에서 소비자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생산-조달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지, 실제 그 과정은 어떠한지 보여줬다면,

3장에서는 한 특정 브랜드의 한 특정 비스킷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아이디어의 출발점인 담당자로부터 출발한다. 어떻게 상품이 만들어지는지를 통해 생산자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과자의 컨셉 - 심리학적 측면에서, 컨셉에 맞는 디자인과 재료 & 이름 선정, 포장 디자인,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선택 된 최종 제품이 판매되기 까지 수 천명의 직원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일부러 비스킷 공장을 선택한 이유는 자명하다, 아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간단한, 누구나 할 수 있는 과자 만들기가 공장에서는 어떻게 변모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대산업의 작업 세분화, 분업화가 강조된다. 그래서 '겨우' 과자를 굽는 일인데도 롤 포장 메커니즘 개선 기술자와 창고보관 공급망 관리 전문가가 같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서로의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당연함을 이해시킨다. 


대학원에서도 같은 단과대 안인데도 교수님들간에, 하다못해 박사들 가운데에서도 서로의 연구가 너무 상이해서 아예 그에 대한 얘기가 되지 않는 경우를 수두룩하게 봤다. 

 점점 사회가 거대해지면서 점차 내가 무슨일을 하는지 그 일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상이 되가고있다. 예전의 직업이 몇개 없던 세상에선 얼마나 이해가 쉬웠던가.

 여전히 어린이들이 접하는 직업은 직관적 이해가 쉬운 소방관, 간호사, 가수, 과학자 등에 머물고 있다. 그 아이들은 나중에 본인이 커서 시스템 관리자, UI/UX 디자이너, 인사관리 직원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오후 한나절에 할 수 있는 일(비스킷 굽기)의 요소들을 분리하여 40여년 동안 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업으로 세분화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큰 이익을 주는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생기지는 않는지 궁금해진다."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으로 타고났다고 생각하도록 종종 배워왔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 진짜 문제는 비스킷을 굽는 것이 의미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이 5천 명의 삶과 6개 제조 현장으로 계속 확장되고 분화된 뒤에도 여전히 의미 있게 여겨지느냐 하는 것이다."



"아이들 책에는 보통 가게주인, 건설 노동자, 요리사, 농부가 등장한다. 인류의 생활을 눈에 쯰게 개선하는 일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공감, 애정, '내 시간'에의 갈망을 해결해주겠다는 모토로 만들어진 '모먼트'라는 비스킷이 오히려 생산자들의 삶에서 바로 그런 문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저자의 질문은 그가 왜 이 비스킷 공장으로 왔는지에 대해 한번 더 감탄하게 만든다.




"나는 르네에게 내 의문을 제기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의미 없는 것들을 판매할 때 가장 큰 돈이 생기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것일까?

... 우리의 로봇이나 엔진은 그것들이 줄 수 있는 혜택 가운데 가장 큰 것을 우리 욕구의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낮은 것에만 가져다준다는 이야기, 우리는 과자를 바르게 만드는 데는 분명히 전문가이지만 아직도 감정적 안정이나 결혼의 조화를 이루어줄 믿음직한 수단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 사실 사람에게 행복이라는 문제는 의식주도 중요하지만 자아 존중, 구성원의 인정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사랑, 자아실현 및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의식주와는 좀 별개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단계이며 오히려 의식주보다 더 어렵고 채우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저자의 말대로 이것에 대한 치열한 성취를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과거의 사람들보다 우리는 더 행복하게 사는 법을 찾았고 또 행복한가?

 어떤 면에서는 나는 우리 시대가 더 이런 분야에서도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인구들은 이 문제를 볼 여유가 없다. 왜냐면 우리는 비스킷을 수억개 만들어야하는 의무가 우선이니까.





"공장은 물론 경제적 존재지만 동시에 건축학, 심리학, 민족지학의 산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블랙스톤 그룹의 소유자들이 벨기에 동부에서 넓은 땅과 200명의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소유하는 것의 완전한 의미를 알고 있을까?... 나아가서, 퇴직을 눈앞에 둘 때쯤 자신들의 투자에서 경제적 측면과 관계없이 어떤 각별한 기쁨이나 책임감을 느낄까?"



"그러나 세이버리 비스킷의 브랜딩 책임자를 조롱하기 전에, ... 비스킷 영업의 핵심에는 의미가 있다고 받아들여줄 만한 명령, 긴급한 동시에 단순한 명령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그것은 생존이다. 노동자들은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라는 오래된 임무에 전념하고 있다."


: 그런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공장 톱니바퀴가 되어버린 3개월동안 1+1 상품 행사나 스티커 한정판을 구상하는 사람들에게 꿈도 없냐는 조롱을 하기 전에 '생존'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라고 한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기꺼이 톱니바퀴가 된다. 



"이 모든 제품의 제조와 홍보는 게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노력으로서, 한때 원시 공동체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었던 수퇘지 사냥만큰이나 심각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존중해주고 위엄을 부여해줄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독특한 문명인가. 엄청나게 부유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작고 또 아주 작은 의미밖에 없는 것들을 팔아 부를 늘리는 문명, 돈을 쓸 만한 가치 있는 목적과 돈을 버는 메커니즘 - 종종 도덕적으로 경멸스럽고 또 파괴적인 메커니즘 -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켜 분별력 있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문명.

... 반면, 자기중심적이고 유치한 나라들은 도넛과 6천 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 덕분에 산과 병동과 두개골 스캐닝 기계에 투자할 자원을 갖추고 있다. ... 상업적인 사회는 종종 비도덕적인 정책을 펼치고, 이상을 무시하고, 이기적인 자유주의에 빠져들지만, 그럼에도 물건이 많은 상점과 돈이 그득한 금고를 갖추어 신전이나 고아원을 건설할 자금을 댈 수 있다."



3장의 주제는 명확하다. 부품화 된 생산자로서의 인간이 마르크스 말대로 소외되었지만, 이러한 자질구레한 상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가 얻게된 부, 그 부를 활용해 얻은 우리의 복지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1차적 욕구를 해결하는 가장 단순하고 유치한 과정을 통해 그 생산자인 인간은 선사시대 때부터 지속해오던 '생존'게임을 해결하는 것이고, 그 사회적인 결과물로 얻는 것이 전체 사회 구성원이 좀 더 살기 좋은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이러한 노동 현장의 소외를 완전히 바꾸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그렇다면 어디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다들 여가 생활에서 창조적인 활동에 목말라 하는 것일까. 

 또한 이러한 자발적 부품화의 약속은 전체적인 사회의 복지 증감인데 후진국일수록 윗선에서 그것을 가져다 먹어버리는 것이 결국 그 안의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빼앗아 버리는게 아닌가 싶다. 무척이나 끔찍한 일이다. 수천만명의 삶의 의미를 빼앗아 버리는 것은. 우리나라도 그런 것이 아닐까.

 작가의 마지막 말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나는 우리 노동의 진부함을 생각하며 희미한 절망감을 느끼다가도, 거기에서 나오는 물질적 풍요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유치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한 투쟁과 절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3장에서 '일'은 인간으로부터 생산품에 대한 소외를 주는 고도로 분업화된 것, 그 동전의 한쪽면은 풍요를 다른 면은 노동에서의 인간 소외를 보여준다.




4. 직업 상담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 <불안>에서도 나왔지만,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믿음'은 보편화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를 끊임없는 불행 속에 빠뜨리는 이 믿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스스로를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지.



그래서 나온 직업이 '직업 상담사'이며, 저자는 그를 방문하고 그에 대해 묘사한다.

처음의 묘사가 참 사람좋고 진심어리고, 따뜻한 이미지라 직업 상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질 뻔 했다.

그러나 의도된 연출같이 마지막에는 그러한 직업상담사들이 받는 보수가 적은 까닭을 알 수 있었다고 맺는다.



그래도 상담을 통해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조언을 해주는 것이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내 생각엔 멋진 일이다. 그렇게 내면을 들어다 볼 여유가 우리 사회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 보다 정신적 차원에서 만족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 시크릿 식의 교육이 저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데, 그 이유를 사회가 과거와 달리 '자신의 의지'로 성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이 실제로 개개인에게 향하기 때문인 것 같이 쓰여져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적어도 나는 그래서 그런 시크릿 류 자기계발서가 역겹다.


알랭 드 보통 본인의 적성검사가 '중간급 행정 및 영업직에 적합하다'로 나왔을 때, 난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렇지, 엉터리 적성검사 같으니라고. 그런데 저자는 바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참 부드럽게 말한 달까...


"솔직히 미래에 대한 의심을 진정시키고 싶은 마음에 이 보고서의 결론을 그대로 따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했다. 동시에 이 보고서는 나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지는 못했으며, 사실 가만히 생각해볼수록 직업 카운슬링 전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 가운데 하나여야 할 일이 여행사 정도의 지위라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니. 

 그러나 어쩌면 이 일이 이렇게 무시당하는 상황은 상담사들이 결국은 인간 본성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반영한 것일 뿐인지도 몰랐다."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일임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작 상담사들이 전지전능하게 답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위치는 지금 그자리라는 것을.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 없는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가지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못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 우리가 경솔하게 결혼을 하고,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집단적인 위로를 받을 가능성을 부인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해도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만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


그렇다. 그의 <불안>에서도 나오고 내가 크게 공감한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계란 넌 안돼- 하는 성공과 성장의 제한점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마다 상황과 타고난 것이 다를 수 있는데 마치 성공한 자들이 성공하지 못한 대다수에게 '노력'이 부족해서다, '너 탓이다' 하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은 정말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신의 시대에서는 '그건 네 탓이 아니란다' 하고 체념이라도 했다면 이 시대에서는 '그것도 못이겨내면 너는 루저다'하는 개개인에 덮어씌워지는 형벌이 주어진다.



4장은 '천직'의 대두와 그로 인해 오는 불안감, 결국 그런 것을 찾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그려낸다.





5. 로켓 과학


독후감이 점차 길어지고 있다. 이러다가 책을 베껴올렸다고 저작권 시비에 걸릴까 두렵다.

그러므로 5장부터는 좀더 간략하게 정리할테다.



이 장에선 두가지가 강하게 기억이 남는다. 하나는 원시부족의 후손들의 낙후된 상황과 그 옆에 자리잡은 선진국의 말쑥한 로켓기지. 또 하나는 전세계 각지에 - 특히 제3세계에 - 흩어져있는 위성기지국의 존재이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기아나 란 작은 나라에 로켓 엔지니어들이 온다는 건 참 기이하다. 게다가 거기서 발사한 위성은 일본의 와우와우TV, 이 책이 나올 당시에는 처음 만들어진 방송국이겠지만 이제는 원래 존재했던 것 처럼 존재하고 있을 터이다. 


전 장에서 인간 내면에 관한 단어와 영국 가정집을 묘사하는 단어가 주를 이뤄 전체적 분위기가 따뜻하고 몰랑몰랑 했더라면 여기서는 이공계인 나도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온갖 과학용어들이 난무한다.


"헤어네트를 쓴 여러 그룹의 엔지니어들이 위성 발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자 현재 과학계의 삶이 개인적 에고의 제한 또는 말살을 의미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적 영광의 기회는 없었다. 전기가 기록되거나 일반인이 기억할 만한 이름으로 남을 전망이 없었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도, 심지어 어떤 상업적 또는 학술적 조직도 명예를 독차지할 수 없는 집단적 기획이었다."


갈수록 이는 심해지고 있다. 저자는 과학자도 아니면서 이를 어떻게 정확히 통찰해냈는지, 참 감탄이 절로 나온다.

모든 학계에서 협업이 일반화 되고 논문은 공동저자수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네이쳐나 사이언스 지에 가려면 정말 여러 학교나 조직이 오랜 기간을 들여 한 가지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나는 명예적인 측면에 욕심이 많아서 '존경받는 과학자'가 되고프다는 막연한 무의식에 진로를 결정했는데, 어느 날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뛰쳐나온 뒤 깨달은 것은 내가 좋아하는 과학자들은 다들 대중서를 잘 써서 유명해진 사람들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진짜 과학자가 되려면 저렇게 큰 프로젝트의 일부가 되어도 관계없이 과학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새로운 지식 창출에 기쁨을 느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버티지 못한 것일 거다.


이 장에서 나오는 인디언들의 우주관은 너무도 동화적이어서 아름답다. 그러나 바로 대비되는 과학자들의 사고체계를 보면 역시 내가 대학생때 내린 결론에 도달한다. 

 더 배운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디언의 동화적인 사고에서 더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배우고 똑똑해져야 한다. 왜냐면 똑똑하고 자연과 환경과 사회를 주무를 줄 알게된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면 스스로의 삶을 지켜낼 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내 삶을 지키려면, '생존'하려면 결국 강해지는 수 밖에 없다. 인간에게 강함은 머리에서 나온다.



"이것은 보는 사람의 경향에 따라서 영, 야훼, 거룩한 삼위일체, 마와리의 화신, 와이와이 우주의 전능한 창조자이기도 했다. ... 그러나 현대의 신의 모습은 가장 세속적이고 이교도적인 기계들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과학은 우리에게 신들을 깔보라고 가르친 것이다."


로켓 발사의 장엄한 광경을 묘사한 뒤 느끼는 허무함과 경외감이 이렇게 나타났다. 현대는 어찌보면 동화가 사라진 곳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재고, 측량하고, 설계한다. 그 결과물이 이 시대의 가장 경이롭고 위대한 것들이다.



"이제 로켓의 지휘권은 쿠루의 엔지니어들로부터 지구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위성 추적 기지국들로 넘어갔다. 그러나 막상 이 기지국이 있는 나라의 주민은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첫 번째 기지국은 대서양 한가운데, 어센션 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곳의 작은 건물에는 한 달 전 배를 타고 프랑스에서 온 기술자가 한 사람 있었다. ... 그 뒤에는 통제권이 가봉의 리브르빌 북부에 있는 외로운 추적 설비로 넘어갔다. 그 다음에는 케냐의 말린디에 있는 기지국으로 통제권을 넘겼다. 이 사슬의 맨 마지막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막 서부에 있는 등대였다."


우리 일반인들은 모르는 지구의 모습이 얼마나 많을까. 엄청나게 많겠지만 나는 그것이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구 곳곳에 심겨진 선진국들의 위성기지국들 이름을 보고 경악했다. 국가단위의 강함은 이 정도구나. 케냐와 가봉의 주민들은 TV 조차 보지 못하는데 위성기지국 옆에 사는 것이다.


그 곳에 지어주는 대신에 그 나라 정부는 무엇을 받았을까? 그것을 자국 국민들이 TV를 볼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




확실히 인간 전체 집단의 기술은 경이로울 정도이다. 인간은 이제 스스로의 결과물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주의 작동 방식을 터득한 이 새로운 주술사들에게로 나의 충성심이 이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들은 얼마나 놀라운 생물들인가! 이들은 얼마나 놀라운 지평을 열어젖혔는가!

...

자연은 19세기에 걸쳐 숭고한 느낌을 자아내는 주된 촉매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기술적 숭고함의 시대로 깊이 들어왔다. 숲이나 빙산이 아니라 슈퍼컴퓨터, 로켓, 입자 가속기가 가장 강렬한 경외감을 자아내는 시대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거의 우리자신에게만 노라고 있다."



"반면 자연은 피를 흘리고 죽어가면서 우리 문 앞에 당도한 예전의 원수처럼 우려와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 회로판에는 존중심을 느끼고 빙하에는 동정심과 죄책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다. 보존 생물학을 배울 때 교수님이 말하신 게 아직도 기억난다.

테디베어라는 것은 현대에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과거 조상들에게 곰이란 지극히 두려운 존재로 '귀여움'과 동치될 수 없는 존재였다. 북극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포식자이다. 범고래는 또 어떤가!

그들은 이제 우리에게 불쌍한 존재, 돌봐줘야하는 존재, 귀여운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자연을 가지고 노는 존재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많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똑똑하고, 정확하고, 맹목적이고, 도덕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동료 인간들 외에는 달리 딱히 숭배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선망, 불안, 오만의 느낌들과 씨름을 하게 되었다."



5장은 현대 과학 발전에서 오는 인간 '일'의 경이로움. 그리고 그 사이에 '믿을 것'의 부재에 관한 것이라 생각한다.






6. 그림


과학자들 다음에는 화가라니. 극도로 대비되는 존재를 통해 직업의 다양성을 보여주려는 것만 같다.

나는 저자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에서 나온 섬세한 묘사에 반했었기 때문에 이번 장은 참 읽기 좋았다. 화가의 일상과 화가가 그리는 자연물들.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이런 언어로 묘사할 수 있었을까 - 감탄사가 절로 나오도록 아름다운 장이었다.


방금 전까지 자연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던 인간은, 이번 장에서 자연물 하나하나를 존중하고 경대하는 존재로 비춰진다. 


"그 제멋대로 뻗은 가지들, 수천 개의 빳빳하고 작은 잎들, 인간 드라마와 아무런 직접적 관련을 맺지 않은 그 놀라운 상태."



"그림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묻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은 우리가 이미 본 것을 눈여겨보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 다만 우리가... 자연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자극한다."


"그러나 이따금씩, 깊은 밤에, 다른 가족이 잠들었을 때, 수전은 그림 앞에서 몇 분 더 미적거리며 자신이 그 인격과 미묘하게 일치를 이룬다는 느낌을 받는다. 더불어 그녀 자신의 역사와 인간성이 다시 확대되어 그녀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느낌도 받는다."


"평소의 우리 모습보다 더 우아하고 지적인 대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인간 본성의 비실용적 측면을 보는 듯하다."


크게 더 덧붙이고 싶지 않다. 예술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관적인 생각일 따름이고. 나는 거기에 동의할 뿐이다. 저자가 너무 편협된 사고로 책의 흐름을 이끈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나와 어느정도 일치하여 읽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그것은 최근에 불었던 성인들의 그림 색칠하기 교본 열풍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일테다. 우리가 일로서 자아를 찾을 수 없는 운명이라면, 우리의 운명은 비생산적인 곳에 안식과 위안을 준비해두었을 것이다.


이따금 그 선물 조차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받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돈만 아는 사람들에게서.



6장에서는 물질 외 가치를 위한 '일'과 그를 통해서 얻는 인간의 '안식', 그 일들의 '가치'를 보여준다.





7. 송전 공학


달리 할 말이 없다. 이 장에서는 발전소부터 런던까지 이어지는 송전탑을 따라 걷는 여정이 나온다.

2장과 비슷했다. 우리가 살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해서 나한테 오는가.

그런데 2장은 그 여정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이에 숨겨진 사람들의 '일'을 보여주었다면

7장은 송전탑 매니아와 함께 걸음으로써 현대 산업 구조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 즉, 우리가 받아들이기 싫어하고 흉물스러워하는 산업물들 - 송전탑, 발전소 등등 - 이 아름다움을 지닐 수도 있지 않냐는 시각이다. 그들은 이제 우리 사회의 일부이고 그렇다면 그 것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안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도 있지 않는가.


"소비자들이 전류에 관하여 어떤 생각도 할 필요가 없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잿빛 강철 철탑이 풍경을 가로질러 저 머나먼 남서부 해안으로부터 달려온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없게 해주는 것이다. 그 남서부 해안의 조약돌 해변에서는 지금도 바위 덩어리처럼 보이는 발전소가 해협에서 밀려오는 수많은 파도와 바위를 깎아내는 힘을 지닌 바람에 맞서며 쉬지 않고 음산하게 윙윙 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7장에서는 우리의 '일'의 결과물 안에서 용도 이외의 가치를 찾아본다. 




8. 회계


회계사들의 힘든 삶과 그들의 직업이 향후 로봇에게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회계사들은 돈을 정말 많이 벌고 있다. 그들은 사실 현대 문명에서 숫자정리만으로도 '돈'이라는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내가 평소에 본직과 비본질적인 직업을 나누는데 회계사는 단연 나한테선 최고의 비본질 직업이다. 물론 그들의 일의 중요성을 격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내게있어 본절적인 일이란 무언가 세상을 더 낫게 만들어 결과가 눈에 보이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본직절인 직업이다. 그리고 특히 그 일의 결과가 사람들의 기본권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회계사는 사실 아예 존재하지 않아도 지구가 돌고 사람이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다. 불편할 뿐. 


현대사회는 불편함을 줄이는 쪽으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게는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 것'은 다 비본질로 치부된다. 나만의 견해인 것이다. 회계사는 부르주아적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이다. 이번 장을 읽기 전에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아마 기차 사고라도 나야 열차 안에 누가 있었는지, 통로 건너편에 국가 경제의 어떤 작은 부분들이 덤덤하게 앉아 있었는지 비로소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호텔, 정부 부처, 성형외과, 과일 묘목회사, 카드 회사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겠지만."

: 이 부분을 읽고났을 때 일기를 썼다. 사람은 모두 이름을 남기기위해서 혈안이라고.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것이 삶의 과정인 것 같다고. 결국 사람들이 날고 기어 봤자 그냥 어느 회사 어느 직함으로 끝나는 존재라면 너무나 허무하다. 최소한 나에게 있어 의미있는 삶이란 자신의 이름으로서 인지되고 사회에서 활동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특히 성공이란 그런 것 같다. 대다수의 많은 시민들은 결국 이름이 사고가 났을 때에나 짧게 등장하고 사라진다. 


"역사는 영웅담을 길게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 가운데 몇 사람만 먼 바다에 나가고 다수는 항구에서 밧줄을 헤아리고 닻의 꼬인 사슬을 풀지 않는가."


그래서 저자는 회계사들을 찾은 것 같다. 유명한 영웅들의 이야기는 시중에 많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일'의 보편적인 측면이 아니다. 일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오히려 가장 보통의 사람들의 범주에서 찾는 것이 옳다. 그리고 회계사는 그 범주내에서 성공적인 집단이다.


"회계가 세상을 보는 특수한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회계사는 나에게 책을 어떻게 또는 왜 쓰느냐고 묻지 않고, 어떤 책의 세금을 몇 년에 걸쳐 낼 수도 있느냐, 아니면 출판할 때 전부 내야 하느냐고 묻는다.

... 더 인상적인 것은 그들에게 지속적인 유산으로 남을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 그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은 야망도, 둔감하고 덧없는 미래를 위해 자신의 통찰을 기록해두고 싶은 야망도 없다."


"그러나 일을 하는 사람이 단지 겁에 질리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만족감을 느껴야만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들이 등장하면서 고용의 규칙을 새로 써야 했다. .. 구속력 있는 법률 문서를 작성하거나, 힘찬 모습으로 설득력 있게 콘도를 팔아야 하는 사람이 찌무룩하거나 원한에 차서는 혹은 병적이거나 분노에 차서는 많은 이윤을 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피고용자의 정신적 복지가 관리자들의 최고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나라 고용주들은 아직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의 향후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노동자의 정신적 복지가 될 것이다.



"권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재구성되었을 뿐이다. 사장이 자신의 앞선 위치를 보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평직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다. 대기업들이 예전 왕족의 지위를 누리는 현실을 보아라.



"사장은 또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권리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 이것도 마찬가지.



저자 특유의 어투로 사무실 광경이 묘사된다. 그 속에 느껴지는 사무직원들의 삶.


8장에서는 현대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화이트 칼라 직종의 하루와 사장부터 직원에 이르는 구성원들을 지켜본다.

보통사람들의 '일'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큰 의미를 갖지 않고 벽돌쌓기와 같은 바쁨으로 이루어진.







9. 창업자 정신


최근 일어나는 창업 열풍을 보면 코딩이 대두된 뒤로 열린 시대는 가히 창업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이 장을 흥미롭게 시작했지만, 웬걸, 이것은 그 시대 이전에 쓰여진 책이다.

그 전에도 창업자들이 존재해왔다는 나에겐 놀라운 사실을 알려줄 뿐 아니라 방식이 다름에도 창업자 마인드의 정수를 꿰뚫고 있는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창업자들이 처한 환경은 까다로운 재정적, 법적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다른 인간들이 실제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상상력과 현실적 태도 사이에서 절묘하게 그 어려운 균형을 잡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균형이 드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디선가 용기를 얻어 창업의 길로 나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 매우 불길하게 느껴진다."


"옛날 사회는 ... 미래를 한번 걸어보라는 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을 무작정 강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평범한 삶은 실패한 삶과 똑같다는 식의 잔인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는 스스로도 사업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데 '음식자체 보다는 우정이나 대화의 기술에 관한 지침을 주는 데 초점을 맞춘 레스토랑'은 아마 그 후 그가 세우게되는 인생학교의 모토가 된 듯 하다. 이 책을 쓰면서 생각해낸 건지, 원래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창업자들과의 만남이 그 스스로도 뭔가 사업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심어주는데, 키워주는데 긍정적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벤처 캐피탈의 실용적인 언어로 자신의 노력을 합리화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속 깉은 곳에서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하는 ...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재정과 산업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인공물, 우리가 종종 지구의 자연적인 특징들만큼이나 불가피하다고 가정해버리는 인공물을 먼데서 이루어지는 알 수 없는 과정의 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체로 비슷한 사람들, 운명은 자신이 만든다고 믿는 대담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인 결과물로 보았다."


"그는 어떻게 일들이 짜맞추어지는지 알았다. 어떻게 슈퍼마켓의 자금을 끌어오고, 어떻게 52층 마천루를 짓는지도 알았다. ... 그는 어떤 풍경을 내다보든 그것을 만든 존재는 신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적어도 이런의미에서는, 진정한 어른이었다."


내가 만난 부자, 돈을 벌줄 아는 사람들, 돈을 이른 나이부터 또래집단보다 스스로 많이 벌어들인 사람들은 모두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었다. 나는 그 대화 속에서 내가 일반적으로 여기던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은 이들에게 놀랐었고 내가 왜 부자가 아닌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강남 거리를 다니면서 각 빌딩이 얼마고 주인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창업자들을 잘 꿰뚫어 본 것은 여기에도 나타난다. 내가 만났던 창업자들은 대부분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정력적인 사람들이 설정한 목표가 ... 실제로 보통사람들이 어떤 식을 결정을 내리는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빛이 바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았다."


"이런 허점은 ... 고객 부족과 즉각적인 파산이라는 벌을 받게 될 터였다.

 반면 보통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보브 경의 능력에는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그렇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사람들은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써대는지 아주 잘 파악한다. 워렌버핏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감각과 관료체계의 절차를 꿰뚫고도 살아남으면서 유토피아적인 현실을 꿈꾸는 소수의 창업자들은 영웅이 되는 것이다. 저자 스스로도 창업을 해서 돌아오겠노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이란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이룩해내려는 본성을 가진 것이다.



9장에서 일이란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창출해내는 가치로 나타내진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들, 그리고 실패하는 사람들이 놓치는 것들이 소개된다.



10. 항공 산업


사실 마지막 장인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대체 왜 항공산업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나 싶었다.


근데 마지막에 가서 이해했다.



"나는 갑자기 심오한 개달음을 얻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에어쇼는 지금 이 순간 전 세계에서 열리고 있는 각 산업 관련 행사 수백 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정말 우리는 얼마나 작은지, 이 거대한 사회는 어찌나 크고 넓은지.

앞서 장황했던 에어쇼의 3일간 여정에 압도당한 독자는 이 문장에서 뒤로 쓰러질 것 같다.


그리고 그 모든 박람회 속에 등장하는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다-라는 것을 디스코 춤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갑자기 그 다음에 길을 잃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놀랍게도 항공기의 무덤에 다다른다. 실제로도 우연인진 모르겠지만(...)


그의 다른 책 '불안'에서 나오듯 하나의 문명에 경이를 보내는 순간에는 폐허를 감상하는 시도들이 포함된다. 항공기들의 최후는 현대 사회에서 나오는 폐허들에 적합할 것이다.


"비행기가 얼마나 빨리 나이를 먹는지 정말 놀랍다. 여기 모인 비행기들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이 생산 라인에서 나온 지 50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리스 신전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인다."


현시대의 박람회에서 분주햇던 사람들이 만든 것은 겨우 50년 뒤에 매우 진부한 것으로,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지게되는 것인 매우 빠른 변화 속에 진행되는 현실이다.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우리의 하찮음과 약함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뻔하고, 너무 잘 알려져 있고, 너무 지루해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과제가 넓게 보면 분명히 말이 안 되는 것임에도, 확고한 결의와 진지함으로 그 과제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과장하고자 하는 충동은 지적인 오류이기는커녕 사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 현재르 ㄹ역사의 정점으로 보는 것, 코앞에 닥친 회의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묘지의 교훈을 태만히 하는 것, 가끔씩만 책을 읽는 것, ...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생활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현자들이 가르친 대로 죽음에 대비하는 것은 죽음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것이다.

.... 죽음이 우리르 기습한들 어떠랴. ... 우리의 모든 기획의 궁극적인 운명을 직접 목격한다면, 우리는 바로 몸이 마비되어 버릴 것이다.


...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10장에서 우리의 일의 궁극적인 결말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준다. 결국 일이나 우리 인생이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다 아무것도 없는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바로 눈 앞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집중해 그 사실을, 그 사실이 주는 불안을 잊게 해준다. 그것이 일이 가지는 진짜 의미 아닐까. 10장에서 일의 궁극적 의미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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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불안

이 책은 매 문장이 밑줄을 긋고 싶을만큼 나를 위한 책이다!

# 이 책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내 주변의 불편했던 사람들과 나를 불편하게 여겼던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속물"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명쾌하게 설명되었다.
나는 속물적인 사람들을 더욱더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 그들은 나의 위치와 재력/권력으로 나를 계속 재본다.

나는 그래서 금융권 사람들이 진취적이고 열정에 차있는 에너지를 발산함에 가치를 두고 따랐으나 결국 그들이 진정 와닿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속물이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모두라고 하진 않겠다. 좋은 의미를 가지고 삶을 열정적으로 사는 금융인들도 꽤 있다! 만나보기도 했고. 다만 누구라도 그 다수의 분위기는 속물적임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대학 초반에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하고 권력을 부여받고 싶었던 사랑에 목마른 나는 뼛속까지 속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걸 눈치챈 -또는 감각적으로 느꼈던- 사람들은 나를 불편해 했다.

졸업을 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걸 찾아가면서 나는 점점 더 '가진 것 없는 사람', '잘나가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런 나의 나약함과 약점, 속내를 드러낼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는 듯 하였다. 그들은 나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곁에 두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왔었고 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말대로 아무도 그 정점에 오래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도 불안했었다. 우리가 진정 삶에서 원하는 건 사랑인데 왜 우리는 그렇게 불안 속에서 서로를 재며 살고 있는 걸까.

[파코 로카] 주름

어쩜...........읽다가 눈물이 났다.





다 읽고나면 표지가 새삼스러워 진다. 짠하다.




우리엄마는 이제 60을 앞두고 있다

엄마는 말은 안하지만 항상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사신다. 외할머니도 아직 정정하신데!

최근들어 노안이 찾아와서 처음 껴보는 안경에 낯설어하고 소화도 잘 안되는 몸에 적응하는 우리 부모님을 가까이서 보면 마음이 짠하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그들의 옆에 매순간 있으면서 위로를 해줄 자신은 없다.


나는 원래 할아버지들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고 그들은 누구보다 긴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경험해볼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느 나이대의 사람들보다 자기 이야기 하기를 참으로 좋아한다. 


그냥 자기 이야기 말고 자기 경험담들을 말이다.


학교 숙제로 갔었지만 노인정에서 6.25 시대상을 들었던 것은 아주 어릴 적인데도 잘 기억난다. 


얼어붙은 한강을 폭파된 다리 때문에 겨우겨우 건넌 할아버지

그 뒤에 계속 산으로 들로 인민군이나 다른 군인들을 피해 피난하던 이야기

어느 모르는 할머니를 만난 두 소년이 먹을 것이 없어 고구마를 얻어먹은 일


그 이야기를 한 할아버지 얼굴은 기억도 안나는 데 이런 일화는 생생히 기억난다.




이렇게 우리 세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 정말 별처럼 많은 -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완전한 무로 돌아가버리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면 정말 인생무상이다.




혹은 역사적 순간을 행했던 이들의 업적들은 한줄로 압축되어 기록에 남겠지. 모년 모월 모일 아무개가 땡땡땡을 발표했다- 이렇게.





그래서 사람들을 그렇게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고 애쓰나보다. 

무(無)로 돌아가기 싫어서. 

자신이 세상에 있었던 흔적을 남기려나보다.




주름은 

스페인의 만화가인 파코 로카의 짧은 단편 만화이다.



표지에서 보이듯 머리에서 흩날리는 과거의 기억처럼

알츠하이머 환자인 주인공은 요양원에 보내진다.




요즈음의 컨텐츠들을 보면 대개가 젊은이들의 사랑, 꿈, 실패, 성공 이다.

그 나이대가 가장 빛나고 응추된 감정들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때문일까.

그치만 인생이 60-80대까지 뿐이라고 해도 40대 이후의 삶이 그 전의 젊은 시절보다 두배 이상 길다.

심지어 100세 시대라 하면 50대까지 살았던 기간 동안 100살때까지 늙은 상태로 이 세상에 남아있어야하는데

그들의 삶, 그들의 감정, 그들의 사랑, 꿈, 실패, 성공은 우리 시대 사람들에겐 어둠속에 가려져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그런 주제이다.


점차 고령화 사회가 되가면서 워낭소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와 같은 노인 중심 컨텐츠가 나오기 시작한 것 같다.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이다. 왜냐면 나이든 사람들이 더 많아질테니까. 사회 전체에서 노인 인구 비율이 높아진다면 그들이 삶의 주체이자 주인공으로 부각될 것이다.


며칠 전 본 영화 인턴도 예전이라면 없을 시니어 인턴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20-30대만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40-100세의 인생이 너무도 길다.




그럼에도 40-100세의 인생이야기가 20-30대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은 노화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슬픈 면 때문일 것이다. 


신체 쇠약, 질병, 거동의 불편함, 수발, 이런 것들을 슬픔과 완전 분리해서 생각하려면

그 사람은 정신력이 매우 강한 것이다.

사실 내가 더이상 똥오줌을 못 가릴 정도로 몸이 불편해져도 나는 나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예전의 빛나던 나의 모습이 계속 기억난다면 그 괴리감은 슬픔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알츠하이머다. '나 자신'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그래도 나일 수 있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은 - 다리를 잃은 육상선수 이야기나 시각장애인인데 성공을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에서 나오듯이 - 내가 누구인지 알고 상황을 분별할 수 있고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기억이 모두 사라져가고 내 뇌가 내 몸을 주체하지도 못한다면.

내 몸뚱이는 건재해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면,

심지어 그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지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건 계속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이 세상에서 천천히 사라져가는 것 - 죽음 - 이 아닐까.........





작품 속에서 주인공 에밀리오의 룸메인 미겔은 시니컬하지만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이 요양원에 없다면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을 것이다.


미겔은 주변 노인들로부터 돈을 계속 받아 챙기는데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돈이 정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요양원에 가지도 못하는 처지라면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제 자식들이 넣어준 덕(?)에 식사도 제공되고 죽는 날 까지 누울 침대도 있다면? 누가 내 지갑 다 털어가도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돈을 모으는 미겔은 참 독특하다


심지어 그는 일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어 아무에게도 정을 주지도 실망하지도 않는다.

부자로 보이는 그는 나이를 먹자 돌봐줄 이가 없어 요양원에 들어온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그는 요양원에서 정신이 말똥한 사람이라 여러 사람을 골탕먹이거나 장난을 치고, 돈을 모아서 탈출 - 살아있는 감정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해소...! - 해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이 점점 제 정신이 아니게 되는 과정을 다 지켜보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알츠하이머는 치료제가 없다. 병이라고 부르기 보단 난 천천히 시작되는 죽음이라고 보는게 맞다고 생각들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역행할 수 없는 죽음의 시작이다.


노인의 죽음을 보는 것은 매우 슬프다.


왜냐면


그는 모든 것으로 부터 버림받게 되기 때문이다.



은행 지점장으로 수십년 일해서 계속 출근해야겠다고 고집부리지만

사회적인 지위로부터 이미 버려졌다



점점 돌봄이 필요해진 아버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들 부부로 부터 버려졌다



이상하게 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책도 읽어보고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보이지만

그 자기 자신을 이루는 이성으로부터도 버려진다



그에게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되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겠지 이 세상으로부터.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건 우연히 룸메가 되어 짧은 시간동안 함께 지낸 미겔이다.

반대로 평생 아무에게도 정 주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정신이 온전한 미겔에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에게도 소중하게 남은 것은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에밀리오뿐이다.



그래서 미겔은 올라간다.


정신이 미쳐버릴 것 같은 삶의 맨 마지막 자리들이 뭉쳐있는 2층으로 올라간다.

그가 떠먹여주는 죽을 먹는 에밀리오 눈에-

알츠하이머의 뇌에- 동그란 형체에 미소가 비친다.




오직 사람의 생애에는 그 미소만이 남나보다.



[발터 뫼어스] 꿈꾸는 책들의 미로

단 한마디 하고 싶다.

: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여, 이 책을 읽지마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판타지 세계관 중 하나인 차모니아 문학은 독일 작가 발터 뫼어스의 그 특유의 문체로 생명력을 얻는데, 이번 책도 시작부터 흥미진진하고 10여년 전에 읽은 듯한 첫 편인 '꿈꾸는 책들의 도시' 초반와 미묘하게 겹치면서 더 활기를 띠었다. (독자인 나도 함께!)


나는 이 작가를 무척 좋아한다. 이 사람의 책들은 기괴한 그림들과 특이한 등장인물들, 그리고 예상 이상의 반전과 전개가 흡입력있다. 


이번 책도 다 좋았다. 재밌는 소설을 읽고 있을 때 남은 책 페이지가 점점 얇아지는 것이 안타까우면서 동시에 빨리 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 적 있는가? 바로 3/4 정도를 지나는 그 순간에 나는 의아했다. 왜 아직도 별다른 모험이 없지? 왜 아직도 여러가지에 대한 '설명'을 할 뿐인거지? 

왜 기승전결의 전결이 나오지 않는거지????


그냥 이번 책은 평화로운 내용인가보다 하고 넘긴것이..............마지막 장에 충격적인 배반을 먹었다.


절대 이 책을 보지 마시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이다.

왜냐면 이 책은 똥을 싸기 시작한 딱 그 쾌감의 시작점에서 끝나니까. 

더욱 비극적인 것은 다음권이 나오기로 한 것이 내년인가 하는데 그것도 올해인가 작년에 무한 연재중단으로 접어들었댔다. 


아 진짜 내가 제일 싫어하는게 연중이다. 하나의 세계가 펼쳐지다 끊기는 그 기분. 차라리 이걸 알지 못했더라면 하는 기분!! 


차모니아 시리즈는 다른 책도 많으니 굳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스스로를 고문할 필요는 전혀 없다. 농담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아예 번역을 안했었으면 좋았을 성 싶다.


어쨌든 최근에 오랫만에 '책 읽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책이며 내가 다시 하루에 몇십분씩 매일 독서하도록 책을 손에 잡게 해준 공로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하늘이시여 제발 다음권 나오게 해주세요. 제가 독일어로 구글링에 페북질을 한걸로도 모자라단 말인가요)



문학동네가 처음 차모니아 문학 번역을 맡게되면서 광고를 무진장 때린게 이 화의 근원이렷다! 게다가 네이버에서 미리보기 연재는 왜 한단 말인가 ㅠ 수습하지 못할 걸 엄청 뿌려대는 격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전 편 격인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엄청나게! 무진장! 흥미진진하다! 낙엽이 물드는데 일독하는 것은 추천한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무방비 상태에, 아무런 권리도 없이, 도덕률도 초월해서, 충격적일 정도로 어설픈 요구만 손에 든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흔히 써먹는 지질하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228p 17.


"왜 우리는 그냥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262p 6.


<<경고: 책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슬픔이 가득찼을 때 읽기 좋은 책이다.


사랑에 눈 먼 사람들에게는 사실, 이런 심리적 롤러코스터가 다 눈에 들어오지 않게 마련이다. 또는 마음이 메말라서 애초에 문을 열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책을 놓은지 꽤 됐는데 오랫만에 우연히 마주쳐서 침대에서 읽기 좋은 책을 만났다.


약간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delicate한 묘사가 약간은 공감을 떨어뜨릴 때도 있었지만

1인칭 화자는 마치 나와 너무도 같아서 '아 역시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다 이러는구나. 다 이런것을 느끼는 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에 가장 크게 좌우되는 것이라 그 물살 한 가운데에 있으면 내 마음이 어떤 상황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데, 이 책에는 그런 시각으로 여러가지 상황에 대해 독백이 나와있어서 좋았다.



여러번 사랑할 때마다 내가 성숙해짐에 따라서 그 맛이 달라질 것 같다.


너무 어릴 때는 이해하기 힘들 성 싶다. 정말 진지하게 타인과 사랑을 하게 될 때, 그럴 때부터 책꽂이에 꽂아두고 머리가 어지러울 때 꺼내 읽어두고 싶은 책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역시 '사랑'이란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최근에 본 영화 '인턴'에서 처음 등장한 프로이드의 유명한 quote "Love and work, work and love. that's all there is" 가 정말 맞다. 인생은 그러하다.


사랑이란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 하늘에게 다시금 감사드린다.

사랑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 애도를. 남은 시간동안 우리는 더 사랑하고 더 사랑해야할 것이다.


연애를 하자는 말보다는 진정성 있는 타인을 향한 사랑을 - 그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 느낀 사람은 삶의 가장 강렬한 색채를 맛보고 세상을 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보다 강한 것이 무엇 있을까. 애초에 사람의 인생이란 어머니의 사랑으로 시작하고 그 충분불충분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크게 좌우된다는 것만 보더라도.





처음에 왕자님이나 공주님을 원한다는 우리의 갈망을 펼치면서 시작하는 비행기 내부의 섬세한 묘사는, 마지막 후반부에 이르러 철자하나 빠지지 않고 똑같이 반복되는데 그 처음의 두근거림과 설렘이 불안의 두근거림과 위협으로 뒤바뀌는 표현이 맘에 들었다.




소소한 묘사들과 여느 연인들이 느낄 법한 감정들에 대한 부분도 좋았고 눈먼 연인들이 보지 못하는 증세에 대한 통찰력들도 무척이나 좋았다. 거기에 더해 1. 2. 3. 4. 숫자로 짧게 끊어놓은 문단에서 튀어나오는 철학적 설명들은 낯설었지만 이해되었고 오랫만에 철학 책을 다시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결국 인문학이 답이라던가. 


내가 살면서 가장 소망하는 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인데, 철학이나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그 느낌을 오랫만에 살짝 느꼈다. 물론 앞에서 전남친에게 싸대기르 맞거나 군대에서 진흙창에서 구르다가 눈에 흙이 튀는 순간이나 내가 밤새서 쓴 보고서를 내 눈 앞에서 쓰레기라고 욕먹는 상황이, 실은 더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끼는 때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삶이 연극이라면 무대의 주인공에 이입해서 이 연극을 제대로 느끼는 경우와 3등관객석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아- 전체적으로 이런 상황이었구나 하면서 이해하는 경우 모두가 삶을 느끼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사실 소설로 이 책을 이해하자면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클로이는 왜 나를 떠났을까? 클로이와 나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건 나의 문제가 발단이었을까 아니었을까? 클로이는 왜 다른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지? 어떻게 사랑하는 남자를 바로 차고 환승할수 있을까? 애초에 이 둘은 잘 맞지 않았는데 일인칭 시점에서 미화된 것은 아닐까? 누가 옳고 그른가?


이런 질문은 답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 책의 목적은 그 스토리 주인공의 잘잘못을 가리거나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시작, 싹 트는 과정, 행복의 절정, 수축, 준비되지 않은 종말, 이별 후 고통, 고통의 벗어남이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과 이와 연관된 철학적 고찰들을 풀어내는 것이 내가 본 이 책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만을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클로이의 입장도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그것은 이 책과의 별개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이 저자 알랭 드 보통이 25살 즈음에 나온 것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또 한가지 내가 느낀 것은 미국에서 만난 많은 미국인들은 이런 섬세하고 인간 내면에 근접한 사고를 거의 하지 않는 듯 보였는데 그 때 '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달라서 그렇다'라고 이해한 것이 잘못된 편견이라는 것이다. 외국 사람들도 저마다 다를 테고 이렇게 섬세하게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지니고 삐지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고 아이같이 굴기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로 모든 외국인을 일반화하지 않아야 겠다(하지만 내가 만난 외국애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외계인 취급했고 당시 내 멘탈이 완전 붕괴하는데 일조를 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고등학교때 전후로는 책을 읽으면 떠오르는 심상이 넘쳐나서 적을 것들이 많았으나 현재의 나는 느끼는 것은 많으나 어떻게 풀어야할지 전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기억하면 좋을 것 같은 문단들만 여기 남겨두도록 하겠다.




"나한테 하지 못할 말이 있다면, 당신 혼자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당신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신뢰를 관계의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러나 살면서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배신도 당해보고 엿도 먹어봤다. 이제는 담담하게 타인의 신뢰하지 못함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연인관계는 다르지 않나? 모든 것을 열어보일 수 있고 자신의 가장 작은 모습을 드러내도 다치지 않을 수 있는게 연인관계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연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요구하고 있고 그렇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신뢰가 없는 관계는 버틸 수가 없다.


"...... 크루아상은 평소보다 더 버터가 많았고 커피는 평소보다 향기가 더 좋았지만, 그것들이 상징하는 어떤 관심과 애정 때문에 나는 곤혹스러웠다. ... "내가 무엇을 했다고 이런 것을 받을 자격이 생겼단말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 정도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짜증에 가까웠다.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는 경우에 타인의 애정을 받으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 든다. ......."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쓸모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 이 기분은 매우 뿌듯하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기분이다.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클로이의 구두는 우리 관계의 초기에 드러난 수많은 틀린 음정들 가운데 한 예에 불과했다. 그녀와 매일매일을 산다는 것은 외국 땅의 새로운 풍토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의 전통과 역사로부터의 이탈로 인한 혼란 때문에 이따금씩 외국 혐오에 젖어드는 것과 비슷했다.......왜 나는 클로이의 구두를 보았을 때는 이런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을까? 왜 나는 나의 일용할 양식을 파는 신문 판매소 주인은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 나중에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그 아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하고 헌신해야 할 텐데 나는 벌써 그러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아이가 피어싱을 한다고 하거나 문신을 한다고 하거나 담배를 핀다고 하면 죽빵을 날려버리고 아주 곤장을 들이댈 것만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 분신과도 같아서 다 내 마음대로 움직이길 바라기 때문일까? 오히려 사랑할 수록 있는 그대로를 지지하고 받아들여야하는 것인데 그게 왜 더 어렵고 욕심이 나는 걸까?


"웃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들의 상대성, 사회나 관계에 내재된 모순, 욕망의 다양성과 충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외로워졌다. 하나의 단어에서도, 언어에 현학적인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주장이 아니라 연인들이 서로를 이해시키려는 연인들에게 간절히 중요한 하나의 단어에서도 오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생각. 클로이와 나는 둘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상당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 사랑, 헌신, 홀림, 이런 단어들은 계속되는 사랑이야기들의 무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켜 때문에 다 닳아버린 것들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언어가 독창적이고, 개인적이고, 완전히 사적이기를 바라는 순간에 나는 감정적 의사소통의 돌이킬 수 없이 공적인 성격과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이란 절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바탕에는 주관적이고, 또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는 윌의 질문 덕분에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특질과 연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특질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직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 김춘수의 '꽃'이 떠오른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를 수도 없이 말해주었는데도 우리가 결혼을 몇 번 했는지, 자식이 몇 명인지,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트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우리도 그들에 대해서 똑같이 잊어버린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마음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나는 클로이가 제공하는 내 인격에 대한 통찰들 덕분에 성숙할 기회를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구태여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성격의 측면들을 지적하는 데에는 연인의 친밀성이 필요하다. ........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에 정통성을 부여해주기를 요구할 때 일어나는 문제는 정확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될 위험이 생긴다는 것이다........그러나 다른 사람들이란 그 정의상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리를 늘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 이 파트가 나는 무척이나 공감되었다. 연애라는 것을 할때마다 매번 새로운 자아를 찾는 느낌이고 그런 내 새로운 부분을 마주할 때마다 신비롭다.


"그 시간 동안 우리의 감정은 엄청나게 소용돌이를 쳤기 때문에 단순히 사랑했다고 말하면 마음은 편해질지 모르지만, 사건들을 절망적일 정도로 투박하게 축약해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랑의 이야기의 가능성과 마주치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가능한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았을까? 어쩌면 현재를 즐기는 것은 불완전하고 위험스러울 정도로 덧없는 현실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내세에 대한 믿음 뒤에 숨는 것이 편안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미래완료형 시제에 살게 되면 이상적인 삶을 현재와 비교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 헌신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삶이 그보다 훨씬 더 행복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기까지 하는 천국에서의 삶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일부 종교의 믿음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대나 기억이라는 보호를 받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삶[천국의 개입은 논외로 하고] 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 이 비유를 사랑으로 옮긴다면, 내가 클로이와 행복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는 것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달걀이 그녀의 바구니 안에 확실하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 이 파트가 나한테는 정말 크게 다가왔다. 바로 내가 저렇게 미래완료형 시제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불안은 부분적으로는 내 행복의 원인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일어서자 걷자 숨쉬자 눈 뜨자 by 테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