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Madrid->Somport <02. Somport 가는 길>

기차는 창이 넓었고 내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마드리드에서 내가 가야할 목적지는 꽤나 멀었다. 일기를 끄적이다가 낯선 풍경들이 나타날 때면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국에서처럼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아야지, 하고 몇번이나 다짐하고 떠났는데. 기차역에 멈출 때마다 보이는 작은 스페인 시골 집들이 내겐 인상적이라 매번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관광객이라고는 하나 없는 무궁화호 같은 기차에서 혼자 찰칵대기 민망시러워 몇번이고 눈치를 보다가 놓쳤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데, 바보같이.



: 내가 탄 기차, 렌페(renfe). 프랑스에 떼제베가 있다면 스페인엔 렌페가 있다.

기차칸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좋았다. 











: 창밖의 그림같은 풍경. 나는 들양귀비를 워낙 좋아하는데 여기는 끝없는 들판과 온화한 기후 때문인지 들양귀비가 무지많이 펼쳐져 있었다. 6월이었는데 밀들이 거의 다 익어가서 여름인 한국과 비교하면 이상하게 느껴지는 가을같은 풍경들이었다.







 창 밖에는 점점 커지는 피레네 산맥과 그 아래 비행기에서 보며 감탄했던 끝없이 펼쳐진 노오란 들판이 뻗어있다. 우뚝 솟아오른 산맥은 그 높이를 자랑하듯 머리가 희끗희끗했고 우리나라 산처럼 부드럽게 솟아오른 게 아니라 누군가 실수로 탁 박아놓은듯,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 성벽처럼 얹어져 있었다. 


출발 전 알아본 이번주 날씨 예고대로 산봉우리 위로는 검고 으스스한 구름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남쪽 지역 6월 날씨는 주로 아침에 비, 온도는 쌀쌀함. 바로 앞에 펼쳐진 평야지대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벌써부터 열기가 이글거리는 것과 대조된다. 눈 앞에 다가오는 자연의 장벽과 주변에 맴도는 언어의 장벽, 낯선 공기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나만 없으면 무척 평화롭고 조화로울 것 같은 풍경 안에서 나는 조금 겁이 났다.

 

 

 

여행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번엔 평소와 달랐다.

 

 

나는 너무 이질적인 존재가 된 것에 예전같으면 즐거웠을 텐데 이번엔 간이 콩알만해졌다.

아마도 직장이나 학업이나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떠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뿌리가 제대로 박히지 않으면 세상 어딜 가나 불안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위축되게 되는 듯 싶다.


게다가 내가 이전까지 했던 해외 경험들은 그 자체에 목적성이 있었는데(교환학생이나 워크캠프) 이번에는 그냥 '내가 가고 싶어서' '내가 계획짜서' '내 돈 들여' 간 여행이라선지 더욱 어색했던 것 같다. 잘하고 있는게 맞는가 하는 그런 두려움?





 



마드리드로부터 사라고사까지 가는 여정은 편했다. 칸도 넓고 내 옆에 아무도 없어서 반쯤 드러누워서 노란 들판과 이국적인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가 잠에 들었다.



이전에 프랑스 기차에서 갈아타야하는데 잠이들어서 하마터면 못 내릴뻔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도착예정시간에 알람도 맞춰놓고 긴장한 채로 잠에 들었다.



다행히 프랑스보다 친절하게 어디라고 방송도 나오고 문제없이 내렸다.


사라고사는 넓었다. 다음 somport 근처에 가는 다음 열차를 타기전에 두시간 정도가 남아서 동네 둘러볼 겸 역을 나왔다. 역사 간이 사물함에 백팩을 넣어놓고 시내에 나갔다. 허기지기도 해서 배나 채울겸!


걷다가 쇼핑몰이 보였는데 아, 저기서 유심칩도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올레!



몰은 미국에서도 자주봤던 그냥 몰이었다. 예전 워크캠프에서 만났던 클라라가 사라고사 출신인게 기억났다. 클라라는 이런 곳에서 나고 자랐겠지. 지금은 뭐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몰에 있는 스페인 주민들을 봤다.





다행히 보다폰 매장이 있었고 (우리나라 skt, kt 매장이 널려있듯) 한산한 몰에 들어온 손님한테 여직원은 매우 친절했다! 솔광장에서 몇시간 기다리느니 이게 훨씬 낫구나 싶었다.


시간도 여유있어서 내 폰 유심칩도 직접 갈아주었다. 말은 서로 안통했지만 유심칩이란 단어는 통했다. ㅋㅋ




폰을 여유있게 새로 켜보고 간단히 마트에서 빵과 오렌지를 샀다. 이번 기차 티켓팅을 도와준 친구는 스페인에서 일년간 교환학생을 했었는데 당시에 오렌지가 아주 맛잇었다고 극찬을 하길래 이번에 오기 전부터 오렌지를 사먹어야지 했다. 빵도 싸고 양 많다고 들어서 나도 사먹어보았다. 한국에서 먹던 거랑 그렇게 크게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새로 탄 기차는 진짜 작았다. 무궁화호 같은 작고 지역주민만 사용하는 듯한 열차였다. 

열차 내에 동양인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괜시리 신경이 쓰였다.

건너편 아저씨들을 스페인어로 크게 떠들었는데 뭔가 시골 특유의 거친 목소리가 인상깊었고 나는 좀 쫄았다ㅎㅎㅎㅎㅎㅎㅎㅎ




기차는 점점 산맥을 향해 돌진했다. 중간에 내가 스페인어를 못알아들어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향하는 도시 전에 다른 곳을 들렸다가 기차가 그대로 후진을 해서 방향만 반대로 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좀 색다른 기분이었다. 



Somport는 구글지도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마을이 아니다. 그냥 어떤 '지점' 이라고 해야할까. 오직 여관 한개만 존재하는 곳이다. 프랑스와의 국경이며, 그렇기 때문에 기차로 갈수가 없다. 중간에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야하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버스 티켓은 별도로 끊어놓진 않았었다. 어쨌든 알아본 바로는 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란 것 뿐.



: 엄청 확대한 상태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ㅠㅠㅋㅋㅋㅋ

구글에서 나와있는 예시 사진이 유일한 알베르게고 옆에 보이는 도로를 따라 스페인을 등지고 걸으면 '여기서부터 프랑스입니다'하는 푯말이 서있다.





열차가 내 목적지에 다다랐다 (마을 이름을 까먹었다. ㅠㅠ) 

버스 정류장이 나는 바로 이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크나큰 착각이다. 역에서 나는 한참을 헤매다가 여행자의 원칙, 모르면 용기내서 주민들한테 물어봐라! 를 시행했다.


역장 아저씨는 나한테 계속 스페인어로 말을 걸었으나 나는 한마디도 못알아듣고 아저씨도 영어를 못하고 둘다 시무룩.......

일단 지도를 꺼내서 목적지를 보여주니 알아는 들으신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해하심.


우여곡절 끝에 저쪽으로 가란 말을 들었는데 시간이 얼마 안남았으니 빨리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Somport 버스 시간표를 주셨던거 같은데 가는 차가 몇대 없었고 곧 막차가 끊길 예정이었다 ㅠㅠㅠ

스페인까지 와서 차 시간땜에 하루종일 이리저리 뛰었다........


진짜 길을 좀 음미하면서 가고 싶었는데 이거 놓치면 일주일 계획이 다 뭉그러진다는 생각에 진짜 피눈물 흘리면서 헐떡이면서 뛰었다.

문제는 뛰는데 내가 맞게 뛰는지 모르겠다는 거 ㅠㅠㅠㅠ 아저씨가 대강 이정표를 체크해주었는데 지도가 너무 단순하게 그려져있었고 나는 스페인어 간판을 읽을수가 없었다. ㅠㅠㅠㅠ 진짜 언어의 중요성을 다시금 실감.



그치만 워낙 시골 마을이었고 조그만해선지 계속 뛰니까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에 다다랐다.

스페인은 거의 대부분의 마을이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어서 잘 모르겠으면 가운데로 가면 된다. 광장에서부터 길을 찾는 것이 더 쉽다.


게다가 여긴 광장이 탁 트인 곳에 위치하고 바로 옆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와 공터가 있어서 마음이 한결 편했다. 어떤 곳들은 광장이 건물로 둘러쌓여있어서 찾기가 매우 힘들다.

광장 한가운데 인포메이션에 재빨리 달려가서 나 버스 타야된다고~~버스 시간표를 보여주니 진짜 하늘이 도우사 광장에 버스터미널이 위치하고 있었다. 


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기차가 좀 늦어서 5분안에 버스 타러 가야하는 상황이었고 역이 마을 바깥에 위치한데다가 택시를 탈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사실 진짜 미칠것만 같은 마음으로 달렸었다.


솔직히 우리 집에서 집앞 지하철역까지만 가는데도 5분은 걸리지 않는가!!...... 진짜 밑져야 본전이다 하는 마음으로 뛰고 또 뛰면서 아 진짜 닥쳐서 뛰는 삶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와 그래도 끝까지 전력질주해야 후회 없다는 마음이 연달아 교차했다.




버스터미널은 말이 터미널이지 그냥 천장있는 버스 차고와 사무소 하나였고 나는 일단 차고에 보이는 버스로 돌진했다. 

그런데 버스는 닫혀있고 사람도 안보이고 ㅠㅠㅠ 나는 놓친줄 알고 그 앞에서 진짜 뱅뱅 돌면서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버스 건너편 차고 안 벤치에 한 할아버지가 자세히 보니 순례자스러운 복장과 조개껍질달린 가방과 지팡이를 짚고 앉아있었다. 




그렇다. 기차도 늦게 도착했지만 버스도 늦게 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타임 만세!





오히려 나는 거기 정류장에서 한참 기다렸다. 

버스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고 나는 그 할아버지 뒷 자리에 탔다.


워낙 시골이라선지 사람도 별로 없었고 우리나라에 있는 일반 버스와 달리 좌석 등받침이 낮고 창이 바로 옆에 넓게 있어서 관광차량 같았다.



이제 산맥 속으로 올라간다.

이 버스를 탐으로써 오늘 목적한 일을 모두 성공리에 마무리 하게되었다. 안도의 마음에 진짜 스스로가 대견하고 방금 전까지 초긴장 상태를 지속했던 피로가 한번에 몰려왔다.


그제서야 여유를 가지고 승객들을 관찰도 하고 풍경도 보았다.

(진짜 사진을 보면 사라고사 때부터 한장도 못찍었다 ㅠㅠㅠㅠ)




: 이렇게 등받이가 낮아 앞좌석 손님이 바로 보인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 앞으로의 여행에서 친해질줄 당시에는 생각치도 못했음.




: 기차에서 보던 풍경과 확연히 다른 차창 밖. 이제 초록이 완연하고 피레네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있었다. 
















Somport는 마지막 정류소였고 사람들이 하나둘 씩 내리기 시작했다. 한 내 또래 같아 보이는 스페인 여성은 마지막 다 되가는 쯤의 한 산골 집 앞에서 내렸는데 가족들과 포옹하는 것이 보였다. 도시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에 집에 온것일까? 여기는 진짜 우리나라 경상북도 태백산맥 시골같이, 우리 할머니네 같이, 집들이 듬성듬성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떨어져있었고 관광객은 제로!였다. 




까미노를 처음 계획하던 때만해도 나는 내가 이런 동네에 올지 전혀 몰랐다. 오는 중에서도 진짜 계속 당황했다. 나를 제외한 승객들은 그냥 일상생활 영역으로밖에 안보였고 관광객이 하나도 없는 지역에 이렇게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완전 혼자! ㅠㅠ


뭔가 어색하고 내가 이방인이 된 느낌이라 불편했다. 남들 다 쓰는 까미노 순례 후기를 보면 안이렇던데 ㅠㅠ

나중에 다 끝나고야 알았지만 유럽사람들도 잘 안오는 길이 바로 여기, 까미노 아라고녜스(Camino Aragones) 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가는 까미노 프랑세스는 이와는 전혀 다른 '순례자들이다~ 여기도 있다~ 저기도 있다~' '한국사람 엄청많다~' 분위기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걸 알게된 뒤로는 내 순례길에 대한 후회가 하나도 없어졌지만, 최소한 Somport로 오는 길 동안에는 진짜 내가 잘못알고 가는건 아닌지, 이미 역사속에 없어진 길은 아닌지, 영업중지인지ㅠㅠㅠ 여러가지 걱정이 계속 들었다.







Somport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 다되었다. 여름의 유럽은 해가 늦게 지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가 종일 걸린 이동이었다. 이젠 앞의 할아버지를 따라 가면 되겠지 해서 안심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짐을 다 내린 후 바로 앞에 보이는 집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갔는데 슥 보니 이 가게 빼고는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들어가서 체크인 하는 할아버지 뒤에 서있으니 알베르게 여주인 분께서 능숙한 영어로(ㅠㅠ 감동 ㅠㅠ 드디어 말이 통함) 순례자냐고 여쭤주셨다. 


고생끝에 얻었던 끄레덴시알을 꺼내드리니 첫 도장을 찍어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네 한국인들은 죄다 '킴'이냐~"




이런 농담도 내가 알아먹을 수 있어서 마냥 좋기만 함.



이미 거기엔 순례자들 몇이 한명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한명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뭐좀 먹을거냐고 물었는데 난 이제 지치고 혼자 낯선이들 사이에 있고 싶지가 않아져서 바로 숙소로 들어갔다.


2층 숙소에 가니 그 할아버지랑 같은 방!


할아버지가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영어가 가능한 스페인 할아버지였다. 짧은 인사를 하고 주위를 좀 둘러보고 온 뒤 아침부터 걸을 생각에 일찍 잠이 들었다.



아 드디어 알베르게다.

까미노다.



허둥지둥 갈팡질팡 했지만 다행히 까미노 시작점에 도착했다. 






: 첫 알베르게 내 방. 가운데 사진에 보이는 것이 스페인 할아버지의 짐과 지팡이

저 지팡이 나중에 부러워짐






: 창 밖 풍경. 자기 전에 나와서 저기 도로 끝까지 걸어가봤다. 그 옆에 보이는 십자가 상은 까미노 책자에 Somport하면 나오는 단골 상징물이었음. 






이렇게 나의 까미노가 시작했다.

일어서자 걷자 숨쉬자 눈 뜨자 by 테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