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무방비 상태에, 아무런 권리도 없이, 도덕률도 초월해서, 충격적일 정도로 어설픈 요구만 손에 든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흔히 써먹는 지질하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228p 17.


"왜 우리는 그냥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262p 6.


<<경고: 책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슬픔이 가득찼을 때 읽기 좋은 책이다.


사랑에 눈 먼 사람들에게는 사실, 이런 심리적 롤러코스터가 다 눈에 들어오지 않게 마련이다. 또는 마음이 메말라서 애초에 문을 열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책을 놓은지 꽤 됐는데 오랫만에 우연히 마주쳐서 침대에서 읽기 좋은 책을 만났다.


약간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delicate한 묘사가 약간은 공감을 떨어뜨릴 때도 있었지만

1인칭 화자는 마치 나와 너무도 같아서 '아 역시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다 이러는구나. 다 이런것을 느끼는 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에 가장 크게 좌우되는 것이라 그 물살 한 가운데에 있으면 내 마음이 어떤 상황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데, 이 책에는 그런 시각으로 여러가지 상황에 대해 독백이 나와있어서 좋았다.



여러번 사랑할 때마다 내가 성숙해짐에 따라서 그 맛이 달라질 것 같다.


너무 어릴 때는 이해하기 힘들 성 싶다. 정말 진지하게 타인과 사랑을 하게 될 때, 그럴 때부터 책꽂이에 꽂아두고 머리가 어지러울 때 꺼내 읽어두고 싶은 책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역시 '사랑'이란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최근에 본 영화 '인턴'에서 처음 등장한 프로이드의 유명한 quote "Love and work, work and love. that's all there is" 가 정말 맞다. 인생은 그러하다.


사랑이란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 하늘에게 다시금 감사드린다.

사랑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 애도를. 남은 시간동안 우리는 더 사랑하고 더 사랑해야할 것이다.


연애를 하자는 말보다는 진정성 있는 타인을 향한 사랑을 - 그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 느낀 사람은 삶의 가장 강렬한 색채를 맛보고 세상을 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보다 강한 것이 무엇 있을까. 애초에 사람의 인생이란 어머니의 사랑으로 시작하고 그 충분불충분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크게 좌우된다는 것만 보더라도.





처음에 왕자님이나 공주님을 원한다는 우리의 갈망을 펼치면서 시작하는 비행기 내부의 섬세한 묘사는, 마지막 후반부에 이르러 철자하나 빠지지 않고 똑같이 반복되는데 그 처음의 두근거림과 설렘이 불안의 두근거림과 위협으로 뒤바뀌는 표현이 맘에 들었다.




소소한 묘사들과 여느 연인들이 느낄 법한 감정들에 대한 부분도 좋았고 눈먼 연인들이 보지 못하는 증세에 대한 통찰력들도 무척이나 좋았다. 거기에 더해 1. 2. 3. 4. 숫자로 짧게 끊어놓은 문단에서 튀어나오는 철학적 설명들은 낯설었지만 이해되었고 오랫만에 철학 책을 다시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결국 인문학이 답이라던가. 


내가 살면서 가장 소망하는 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인데, 철학이나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그 느낌을 오랫만에 살짝 느꼈다. 물론 앞에서 전남친에게 싸대기르 맞거나 군대에서 진흙창에서 구르다가 눈에 흙이 튀는 순간이나 내가 밤새서 쓴 보고서를 내 눈 앞에서 쓰레기라고 욕먹는 상황이, 실은 더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끼는 때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삶이 연극이라면 무대의 주인공에 이입해서 이 연극을 제대로 느끼는 경우와 3등관객석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아- 전체적으로 이런 상황이었구나 하면서 이해하는 경우 모두가 삶을 느끼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사실 소설로 이 책을 이해하자면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클로이는 왜 나를 떠났을까? 클로이와 나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건 나의 문제가 발단이었을까 아니었을까? 클로이는 왜 다른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지? 어떻게 사랑하는 남자를 바로 차고 환승할수 있을까? 애초에 이 둘은 잘 맞지 않았는데 일인칭 시점에서 미화된 것은 아닐까? 누가 옳고 그른가?


이런 질문은 답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 책의 목적은 그 스토리 주인공의 잘잘못을 가리거나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시작, 싹 트는 과정, 행복의 절정, 수축, 준비되지 않은 종말, 이별 후 고통, 고통의 벗어남이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과 이와 연관된 철학적 고찰들을 풀어내는 것이 내가 본 이 책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만을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클로이의 입장도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그것은 이 책과의 별개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이 저자 알랭 드 보통이 25살 즈음에 나온 것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또 한가지 내가 느낀 것은 미국에서 만난 많은 미국인들은 이런 섬세하고 인간 내면에 근접한 사고를 거의 하지 않는 듯 보였는데 그 때 '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달라서 그렇다'라고 이해한 것이 잘못된 편견이라는 것이다. 외국 사람들도 저마다 다를 테고 이렇게 섬세하게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지니고 삐지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고 아이같이 굴기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로 모든 외국인을 일반화하지 않아야 겠다(하지만 내가 만난 외국애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외계인 취급했고 당시 내 멘탈이 완전 붕괴하는데 일조를 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고등학교때 전후로는 책을 읽으면 떠오르는 심상이 넘쳐나서 적을 것들이 많았으나 현재의 나는 느끼는 것은 많으나 어떻게 풀어야할지 전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기억하면 좋을 것 같은 문단들만 여기 남겨두도록 하겠다.




"나한테 하지 못할 말이 있다면, 당신 혼자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당신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신뢰를 관계의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러나 살면서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배신도 당해보고 엿도 먹어봤다. 이제는 담담하게 타인의 신뢰하지 못함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연인관계는 다르지 않나? 모든 것을 열어보일 수 있고 자신의 가장 작은 모습을 드러내도 다치지 않을 수 있는게 연인관계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연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요구하고 있고 그렇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신뢰가 없는 관계는 버틸 수가 없다.


"...... 크루아상은 평소보다 더 버터가 많았고 커피는 평소보다 향기가 더 좋았지만, 그것들이 상징하는 어떤 관심과 애정 때문에 나는 곤혹스러웠다. ... "내가 무엇을 했다고 이런 것을 받을 자격이 생겼단말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 정도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짜증에 가까웠다.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는 경우에 타인의 애정을 받으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 든다. ......."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쓸모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 이 기분은 매우 뿌듯하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기분이다.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클로이의 구두는 우리 관계의 초기에 드러난 수많은 틀린 음정들 가운데 한 예에 불과했다. 그녀와 매일매일을 산다는 것은 외국 땅의 새로운 풍토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의 전통과 역사로부터의 이탈로 인한 혼란 때문에 이따금씩 외국 혐오에 젖어드는 것과 비슷했다.......왜 나는 클로이의 구두를 보았을 때는 이런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을까? 왜 나는 나의 일용할 양식을 파는 신문 판매소 주인은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 나중에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그 아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하고 헌신해야 할 텐데 나는 벌써 그러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아이가 피어싱을 한다고 하거나 문신을 한다고 하거나 담배를 핀다고 하면 죽빵을 날려버리고 아주 곤장을 들이댈 것만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 분신과도 같아서 다 내 마음대로 움직이길 바라기 때문일까? 오히려 사랑할 수록 있는 그대로를 지지하고 받아들여야하는 것인데 그게 왜 더 어렵고 욕심이 나는 걸까?


"웃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들의 상대성, 사회나 관계에 내재된 모순, 욕망의 다양성과 충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외로워졌다. 하나의 단어에서도, 언어에 현학적인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주장이 아니라 연인들이 서로를 이해시키려는 연인들에게 간절히 중요한 하나의 단어에서도 오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생각. 클로이와 나는 둘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상당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 사랑, 헌신, 홀림, 이런 단어들은 계속되는 사랑이야기들의 무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켜 때문에 다 닳아버린 것들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언어가 독창적이고, 개인적이고, 완전히 사적이기를 바라는 순간에 나는 감정적 의사소통의 돌이킬 수 없이 공적인 성격과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이란 절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바탕에는 주관적이고, 또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는 윌의 질문 덕분에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특질과 연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특질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직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 김춘수의 '꽃'이 떠오른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를 수도 없이 말해주었는데도 우리가 결혼을 몇 번 했는지, 자식이 몇 명인지,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트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우리도 그들에 대해서 똑같이 잊어버린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마음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나는 클로이가 제공하는 내 인격에 대한 통찰들 덕분에 성숙할 기회를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구태여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성격의 측면들을 지적하는 데에는 연인의 친밀성이 필요하다. ........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에 정통성을 부여해주기를 요구할 때 일어나는 문제는 정확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될 위험이 생긴다는 것이다........그러나 다른 사람들이란 그 정의상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리를 늘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 이 파트가 나는 무척이나 공감되었다. 연애라는 것을 할때마다 매번 새로운 자아를 찾는 느낌이고 그런 내 새로운 부분을 마주할 때마다 신비롭다.


"그 시간 동안 우리의 감정은 엄청나게 소용돌이를 쳤기 때문에 단순히 사랑했다고 말하면 마음은 편해질지 모르지만, 사건들을 절망적일 정도로 투박하게 축약해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랑의 이야기의 가능성과 마주치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가능한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았을까? 어쩌면 현재를 즐기는 것은 불완전하고 위험스러울 정도로 덧없는 현실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내세에 대한 믿음 뒤에 숨는 것이 편안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미래완료형 시제에 살게 되면 이상적인 삶을 현재와 비교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 헌신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삶이 그보다 훨씬 더 행복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기까지 하는 천국에서의 삶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일부 종교의 믿음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대나 기억이라는 보호를 받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삶[천국의 개입은 논외로 하고] 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 이 비유를 사랑으로 옮긴다면, 내가 클로이와 행복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는 것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달걀이 그녀의 바구니 안에 확실하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 이 파트가 나한테는 정말 크게 다가왔다. 바로 내가 저렇게 미래완료형 시제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불안은 부분적으로는 내 행복의 원인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일어서자 걷자 숨쉬자 눈 뜨자 by 테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