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7. 01:26 學問如逆水行舟/서재
어쩜...........읽다가 눈물이 났다.
다 읽고나면 표지가 새삼스러워 진다. 짠하다.
우리엄마는 이제 60을 앞두고 있다
엄마는 말은 안하지만 항상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사신다. 외할머니도 아직 정정하신데!
최근들어 노안이 찾아와서 처음 껴보는 안경에 낯설어하고 소화도 잘 안되는 몸에 적응하는 우리 부모님을 가까이서 보면 마음이 짠하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그들의 옆에 매순간 있으면서 위로를 해줄 자신은 없다.
나는 원래 할아버지들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고 그들은 누구보다 긴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경험해볼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느 나이대의 사람들보다 자기 이야기 하기를 참으로 좋아한다.
그냥 자기 이야기 말고 자기 경험담들을 말이다.
학교 숙제로 갔었지만 노인정에서 6.25 시대상을 들었던 것은 아주 어릴 적인데도 잘 기억난다.
얼어붙은 한강을 폭파된 다리 때문에 겨우겨우 건넌 할아버지
그 뒤에 계속 산으로 들로 인민군이나 다른 군인들을 피해 피난하던 이야기
어느 모르는 할머니를 만난 두 소년이 먹을 것이 없어 고구마를 얻어먹은 일
그 이야기를 한 할아버지 얼굴은 기억도 안나는 데 이런 일화는 생생히 기억난다.
이렇게 우리 세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 정말 별처럼 많은 -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완전한 무로 돌아가버리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면 정말 인생무상이다.
혹은 역사적 순간을 행했던 이들의 업적들은 한줄로 압축되어 기록에 남겠지. 모년 모월 모일 아무개가 땡땡땡을 발표했다- 이렇게.
그래서 사람들을 그렇게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고 애쓰나보다.
무(無)로 돌아가기 싫어서.
자신이 세상에 있었던 흔적을 남기려나보다.
주름은
스페인의 만화가인 파코 로카의 짧은 단편 만화이다.
표지에서 보이듯 머리에서 흩날리는 과거의 기억처럼
알츠하이머 환자인 주인공은 요양원에 보내진다.
요즈음의 컨텐츠들을 보면 대개가 젊은이들의 사랑, 꿈, 실패, 성공 이다.
그 나이대가 가장 빛나고 응추된 감정들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때문일까.
그치만 인생이 60-80대까지 뿐이라고 해도 40대 이후의 삶이 그 전의 젊은 시절보다 두배 이상 길다.
심지어 100세 시대라 하면 50대까지 살았던 기간 동안 100살때까지 늙은 상태로 이 세상에 남아있어야하는데
그들의 삶, 그들의 감정, 그들의 사랑, 꿈, 실패, 성공은 우리 시대 사람들에겐 어둠속에 가려져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그런 주제이다.
점차 고령화 사회가 되가면서 워낭소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와 같은 노인 중심 컨텐츠가 나오기 시작한 것 같다.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이다. 왜냐면 나이든 사람들이 더 많아질테니까. 사회 전체에서 노인 인구 비율이 높아진다면 그들이 삶의 주체이자 주인공으로 부각될 것이다.
며칠 전 본 영화 인턴도 예전이라면 없을 시니어 인턴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20-30대만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40-100세의 인생이 너무도 길다.
그럼에도 40-100세의 인생이야기가 20-30대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은 노화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슬픈 면 때문일 것이다.
신체 쇠약, 질병, 거동의 불편함, 수발, 이런 것들을 슬픔과 완전 분리해서 생각하려면
그 사람은 정신력이 매우 강한 것이다.
사실 내가 더이상 똥오줌을 못 가릴 정도로 몸이 불편해져도 나는 나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예전의 빛나던 나의 모습이 계속 기억난다면 그 괴리감은 슬픔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알츠하이머다. '나 자신'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그래도 나일 수 있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은 - 다리를 잃은 육상선수 이야기나 시각장애인인데 성공을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에서 나오듯이 - 내가 누구인지 알고 상황을 분별할 수 있고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기억이 모두 사라져가고 내 뇌가 내 몸을 주체하지도 못한다면.
내 몸뚱이는 건재해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면,
심지어 그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지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건 계속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이 세상에서 천천히 사라져가는 것 - 죽음 - 이 아닐까.........
작품 속에서 주인공 에밀리오의 룸메인 미겔은 시니컬하지만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이 요양원에 없다면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을 것이다.
미겔은 주변 노인들로부터 돈을 계속 받아 챙기는데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돈이 정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요양원에 가지도 못하는 처지라면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제 자식들이 넣어준 덕(?)에 식사도 제공되고 죽는 날 까지 누울 침대도 있다면? 누가 내 지갑 다 털어가도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돈을 모으는 미겔은 참 독특하다
심지어 그는 일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어 아무에게도 정을 주지도 실망하지도 않는다.
부자로 보이는 그는 나이를 먹자 돌봐줄 이가 없어 요양원에 들어온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그는 요양원에서 정신이 말똥한 사람이라 여러 사람을 골탕먹이거나 장난을 치고, 돈을 모아서 탈출 - 살아있는 감정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해소...! - 해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이 점점 제 정신이 아니게 되는 과정을 다 지켜보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알츠하이머는 치료제가 없다. 병이라고 부르기 보단 난 천천히 시작되는 죽음이라고 보는게 맞다고 생각들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역행할 수 없는 죽음의 시작이다.
노인의 죽음을 보는 것은 매우 슬프다.
왜냐면
그는 모든 것으로 부터 버림받게 되기 때문이다.
은행 지점장으로 수십년 일해서 계속 출근해야겠다고 고집부리지만
사회적인 지위로부터 이미 버려졌다
점점 돌봄이 필요해진 아버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들 부부로 부터 버려졌다
이상하게 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책도 읽어보고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보이지만
그 자기 자신을 이루는 이성으로부터도 버려진다
그에게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되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겠지 이 세상으로부터.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건 우연히 룸메가 되어 짧은 시간동안 함께 지낸 미겔이다.
반대로 평생 아무에게도 정 주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정신이 온전한 미겔에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에게도 소중하게 남은 것은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에밀리오뿐이다.
그래서 미겔은 올라간다.
정신이 미쳐버릴 것 같은 삶의 맨 마지막 자리들이 뭉쳐있는 2층으로 올라간다.
그가 떠먹여주는 죽을 먹는 에밀리오 눈에-
알츠하이머의 뇌에- 동그란 형체에 미소가 비친다.
오직 사람의 생애에는 그 미소만이 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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