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9. 20:18 學問如逆水行舟/서재
진작 읽었는데 후기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오랫만에 만난, 읽다가 영혼이 떨려 눈물이 난 책이다.
그냥 내가 처한 모든 상황과 내가 겪은 모든 시간들에 대한 답을 주었다.
아주 아름답고 힘이 솟는 답. 그리고 닫혀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답.
기존의 내 생각들과 상반되지 않는 공존하는 답.
삶의 의미는 어떤 상황이더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데서 나온다는 것.
내가 누구에게 유용하거나, 남을 돕거나, 유명해지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끔찍하고 비통하고 처량한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내 태도를 유지하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여전히 내 몫이며
그 상황 속에서 이뤄지는 '현재'로부터 '미래'에 이어지는 내 선택들이 나의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과거들은 내가 가치롭게 생각하는 선택들로 말미암아 빛이나게 되고
나는 내 의지의 구현을 보며 삶의 맨 끝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황한 듯 보이지만 한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 자유의지가 나의 의미를 만들어준다는 것.
때로 혼자먹는 저녁이 잦아지고 아무도 부를이 없고, 나를 써먹어주는 사람도 없는 기간이 길어질 때면
나는 무척이나 무기력해지고. 스스로가 쓸모없는, 무의미한 인간같이 여겨진다.
그럴 때에도 프랭클 박사의 말에 따르면
그런 나로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아무렇게나 시간을 내팽겨둔채로 좌절하며 보낼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기회를 위해 용맹하게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설지
최소한 옆의 힘든 이웃을 돌볼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는지
긍정적으로 대처하려고 유머를 구상한다든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또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은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잘나야지만 의미있고
그렇지 못하면 의미 없다고 여겼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성공하지 못한 나와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 임시의 시간 속의 나는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고선 이런 시간 속에서 나의 선택이 결국 나를 의미있게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다.
너무 당연한 말인가?
진짜 무기력하고 우울한 사람에게는 마치 빛과 같은 말들이었다.
그 부분을 읽은 날을 잊을 수 없다.
함박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책을 읽다 여러번 울었다.
이해가 된 다음에 잠시 책을 덮고 한 정거장을 눈을 맞으며 걸었다.
세상이 참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는데
이제 삶이 의미있게 느껴졌다.
나는 가장 최하층의 사람이 되더라도
그 상태에서 내가 만들 선택들로 인해 내가 '의미'있어질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 잘나지 않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충분히 모든 순간에 가치있음을 느꼈다.
얼마나 쓸모있고 인정받느냐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어떤 사람으로 남으려 애썼는가' 에 내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뜻인즉, 앞으로 엄청난 고난과 시련과 좌절이 닥쳐도,
내가 넝마같이 찢어지고 쓸모없는 존재가 된 듯 하여도
내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한, 나는 내 뜻을 세상에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선택들로 하여금.
아주 작은 선택들로 하여금 말이다.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을지.
제때에 식사를 할 지.
옷을 깔끔하게 다려 입을 지.
상냥한 미소를 지을 것인지.
험한 말을 꾹 눌러 참을지.
그런 작은 것들로도 말이다.
그런 것들로도 나는 '따뜻한 사람으로 남겠다'는 의미를 남길 수도 있고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이라는 의미를 남길 수도 있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선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남길 수도 있겠다.
사실, 엄청 유명한 '위인'이 되고 싶어했다.
돈을 천문학적으로 벌거나, 뛰어난 발견을 하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 말이다.
철이 들 무렵엔 그런 성공들은 물론 존경스럽지만
수백년만 지난다면 아마, 교과서에 남기조차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것이 무가치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족부양에 대한 책임도 기꺼이 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번 뿐인 인생, 뭔가 크게 하나 남겨서 발자욱을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는데,
그게 정말 그냥 되는 것도 아니오, 지금 세대에서 세계 1위를 해도 수백년뒤에 없어질 거라니 정말 힘이 쭉 풀렸다.
게다가 어차피 아무것도 흔적없이 사라질 것들인데 하루하루 해내야 하는 일들은 너무도 힘들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살지는 않을 테다.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중요했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스스로를 무의미하게 여겼다.
무언가 눈에보이는 것을 남겨야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책은 내게 내 가치관을 남기는 것이
진짜 내 의미를 세계에 남기는 것이라고 가르쳐줬다.
돈을 벌어서, 성공해서, 유명해져서 삶의 의미가 남는 것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선택들을 끝없이 지속해서
결국은 죽을 즈음에 '아, 김 아무개는 참 이런이런 사람이었다'
하는 것이 나라는 한 개인의 삶의 의미인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위인들도 '내가 위대한 일을 해야겠다'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힘든 가운데에서도 관철해낸 결과로 유명해진 분들임을 깨달았다.
특히 무슨 조직에 들어가서, 시험에 붙어서, 그 뒤에 내 의미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무직상태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혼란 속에서도 내 의미는 발현되는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
내 일을 사랑하는 것
그 어느 것이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 가치를 위해서
하루하루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내 삶의 의미를 구현하는 길이다.
지금 하루하루의 내 선택들이 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형성한다는 것에 소름끼치게 동의하면서
내 삶을 내가 참 무책임하게 내버려뒀구나 싶었다.
될대로 되라 하는 마인드가 없잖아 있었는데
많이 반성했다. 나는 내가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아가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할 책임이 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땐, 밤에 잠들기 전에 30분씩 읽곤 했는데, 그 전 책은 말랑말랑해서 잠들기에 도움이 되었으나 이번 책은 수용소의 끔찍한 생활이 나와서 읽기 꺼려지곤 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이 책은 나치의 억압에 대한 책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존재하는 사람의 마음, 그 자체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신이 계셔서 이렇게 뛰어난 정신의학자를 이렇게 끔찍한 지옥 속에 넣으신 것일까.
역사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이 우리에게 큰 지혜를 주었다.
이 후로는 나에게 와닿은 책의 문구를 적어두겠다.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내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 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계산이지 희생이 아니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도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그리고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나게 된다."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의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 예를 들자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도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 감각 - 내면의 시간 -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감자들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여기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언급되어 이 책을 다 읽은 뒤에 빌렸으나 작중 초반 분위기가 너무 암울한 듯 하여 손이 안가는 중.....
"당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 한 저명한 연구전문 심리학자는 강제수용소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 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마디 더 붙이자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나라 취준생, 고시생, 온갖 미생들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이 끊임없이 고통받는 것이다. 학생때와 달리 이것은 아무도 그 기간의 '끝'이 언제인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 이 뒤에 묘사되는 수감자들이 느끼는 '일시적인 삶'은 정말 모든 페이지가 가슴을 울린다. 저작권 생각때문에 다 못 적는게 아쉽다. 정말 다 좋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삶은 전혀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 나도 정말 그랬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시대에 복고 열풍이 부는 것도 이 때문은 아닐까?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 이는 사실 무척이나 과한 요구이다. 동물인 인간은 외부에서 이토록 가혹한 환경이 둘러싸게 되면 그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만 해도 정신의 모든 면을 다 써버릴 수밖에 없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제 3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여기서 행동해 나아갈 것인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는데, 이는 배고픔, 무뎌진 감각, 희미한 이성, 고통, 모욕, 기타 생각하기도 어려운 감정적 좌절과 괴로움을 느끼는 상황에서 이성을 차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DNA에 프로그래밍 된 데로 고통이 닥치면 고통을 가장 완화하는 방면으로 기를 쓰기 마련이다. 그게 어찌보면 생존욕구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저자는 그 본능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 길을 제시한다. 나는 때론 왜 그렇게 까지 의미있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사실 지금 느끼는 고통, 즐거움, 괴로움과 같은 감정이 '나 자신'한테는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동시에 위대한 인물들은 정말 일반적인 반응을 다 뛰어넘어야 나타나는 것임에 대해 경외감이 든다. 저자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와 같이 말한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이런 끔찍하게 어려운 일을 우리가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테다. 삶의 의미가 없다면, 그냥 고통을 완화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사실 자살이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삶을 마감하는 것이 내 존재 이유인가? 그러면 너무 슬프고 좌절 밑의 좌절이 다가오지 않는가.... 플랭클 박사는 삶의 희망을 주기위해서 어려운 길을 가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괴로움에도 이것은 희망의 길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살아가기 위한 의지를 자아내기 위해선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 그 의미라는 것은 자신을 가치 있도록 만드려는 의지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고통에 함몰되지 말고 스스로를 초월하는 기회라고 여기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 의지가 내가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즐겁지만은 않은 인생관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고 자란 이 세계는 사실 그다지 항상 즐겁지만은 않은 곳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마다 이것이 결여되있었다. 남들은 10년뒤 자신을 그리면서 있는데, 나는 그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내년의 나 자신이 그 안에서 갖고 싶은 미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반대로 나는 그만두는 것에 대해 나의 미래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쉽게, 더 즐겁게 사직서를 쓸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 p.133
: 그렇다, 미래에 대한 믿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말 중요하다. 삶을 구렁텅이 속에서 일으키는 존재이고, 삶을 일순간 무가치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정말 중요하다. 이것이 없는 삶은 마치 영혼에 구멍이 뚫린 것만큼이나 허무하고 괴롭다.
이것이 없어져버린 수감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뒤에 설명이 나온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떠한 반응에도 무감각해지며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적이 있지 않은가?
살아갈 의지와 힘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은 무서울만큼 급속도로 삶에서 멀어진다. 심지어 체력과 면역력조차 약해진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 삶에 대한 의지...........
정말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다. 내 위치와 상태를 객관화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침대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기만 하는 존재. 나는 죽을 상황이었다. 지금도 사실 의지가 없다. 어떻게 미래에 대한 믿음을 찾아야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그것도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리 읽어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아직 내공이 부족한가..
그래도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목표라는 건 내가 만들어가야하는 것임도 깨달았다. 남이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지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했다."
: 이 부분의 소제목은 [살아야 할 이유]이다. 나는 이 제목을 발견하고 드디어 해답이 내려지는 구나! 옳다거니! 하고 읽기 시작했더랬다.
그리고 답을 얻었냐고? 아니다. 나는 그 해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이 해답은 지금의 나로서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너무 모호하게만 들린다. 한가지, 내 행동과 태도로 인해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만 지금은 이해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책임감을 가질 것과 그 과정 자체에서 삶의 의미가 생겨난다는 것.
그러므로 지금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과제를 찾고 내 방식대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
허구한 날 명상하고 나 자신이 인생에서 완수해야할 비젼을 구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
언젠가 더 시간이 지나고 더 경험을 쌓고 내가 더 현명해 질 때 또 다시 이 부분을 읽었으면 한다. 그 마음에서 이 부분을 다 적어두었다. 그 때의 나는 이 글을 더 잘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그 어떤 책이나 기사나 인터넷 자료들보다도 바로 이 책에서 삶의 진짜 의미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방금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세 첫 완패를 기록했다. 인간은 앞으로도 인공지능에게 끊임없이 패배할 것이다. 이것은 그 시작인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인공지능에게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패배당하는 인간의 삶과 개인적인 미래, 삶의 희망에 대해 누가 신경쓰고 있는가? 아무도 없다. 이세돌은 만약에 5판 완패를 당한다면 바둑기사로서의 삶 자체에 돌을 던져버릴까? 그 이후로 그에게 바둑은 전과 같은 의미일 수 있을까.
사람은 감정이 있는 동물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렇게나 대하면 개개인에게는 끔찍한 일이 닥칠 수도 있다. 감정적인 고통은 계산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해득실관계에서는 무의미해보이는 상태에서도 인간은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알파고가 아무리 이긴다 해도 실질적으로 이세돌을 죽이지는 못한다. 정신을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건 이세돌 본인이 얼마나 강하게 이겨내느냐에 달린 것일 테다. 죽지 않으면 인간은 일어날 수 있다. 기계는 애초에 실패와 성공 속에서 좌절과 환희를 느끼지 못한다. 실패하면 새로 계산하고 해법을 찾으면 되고 성공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사람은 좌절과 나락 속에서 이겨내는 인간 자체에 갈채와 존경을 보낸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더 발달할 수록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 유능하고, 똑똑한 인간이 존경받는 시대가 저물어간다. 그들도 물론 뛰어나고 대단하지만 그들이 기계 앞에서 패배할 때 보이는 태도, 그것이 존경받는 시대가 떠오를 것이다. 패배한 뒤에도 스스로를 잘 추스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자세를 갖추는 것, 무너지지 않는 것! 그리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
이세돌도 이번 패배 이후 승리할 지 모르겠으나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알파고 또는 다른 인공지능에게 질 수 있다. 그 패배 이후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것이 '이세돌'이라는 사람에 대한 진짜 역사로 남을 것이다. 사람의 삶의 의미는 그 패배 이후의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패배와 좌절, 시련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을 놓아버리는 태도가 우리를 무너뜨린다. 이 책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공정하게 얘기해서 미래가 가망 없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도 모두 생각을 같이 했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 드리워져 있는 장막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또한 나는 과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즐거운 일들과, 그 빛이 현재의 어둠 속에서도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를. 이때 나는 또 시를 인용했다. ...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 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환멸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토록 잔인해 보이는 운명 그 자체이다.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까지 가보아싿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이후에는 개인으로서의 저자라기 보다는 정신과의사로서의 저자의 목소리가 더 드러난다. 그러면서 더 전문용어가 많이 나오고 더 객관화시켜 말하게 되면서 나의 공감도 떨어졌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내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 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 많지 않은가? 특히 학교에 보면 말이다. 많은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지 못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성적 탐닉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잇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저자는 피할 수 없는 시련을 겪는 사람은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품위있는 것으로 여길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태도의 전환이 시련을 의미로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라고.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덯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은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 또한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장도 명확히 이해하진 못했다.
다만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두면 오히려 갖지 못한다는 것.
"... 여론조사를 보면 조사에 응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유명한 예술가도 아니고 유명한 과학자도 아니었다. 유명한 정치가도 아니고, 유명한 운동선수도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당당하게 곤경을 이겨낸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가장 눈물이 나는 이야기'는 곤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인간적이다.
지금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이겨내는 인간이 되기를. 나 스스로에게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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